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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회색의 20세기
혁명과 회색의 20세기
  • 이상빈
  • 승인 2014.10.30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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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종종 대량 학살의 시대로 그려지는 동시에 압제자에 맞선 다양한 형태의 봉기들이 일어난 시기다. 또한 세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에 따라 위생과 군사력 측면에서 유례없는 전복이 도래한 시기다. 특히 20세기 전반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두 전체주의가 인류를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만들었고, 세상을 피와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던 폭력의 시대였다.

그러한 20세기는 이제 끝난, 과거의 세기일까? 우리는 그 시대와 진정 결별했을까? 안타깝게도 20세기가 낳은 광기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일례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시기는 1940년대이지만 이 주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취급되고 있다. 20세기와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인종과 종교 갈등으로 크고 작은 국지전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20세기의 연장선에서 살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리하여 20세기를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데, 마침 20세기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역사 평론서가 출간되었다. 바로 <르몽드 20세기사>다.

이 책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집필진을 비롯해 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 인구학자, 지리학자, 저널리스트, 지도 제작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41명이 협력해서 만들었다. 우리 시대에 자행되고 있는 폭력에 대해 사회학적·문화적으로 접근하는 엔조 트라베르소, 20세기의 전쟁과 기억, 이데올로기에 대해 광범위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세르주 볼리코프 같은 여러 역사가의 협력은 책의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20세기를 크게 네 시기로 나누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인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좋은 시대)부터 공산주의의 대두를 거쳐 1929년 대공황까지 다룬 ‘광기의 시대’, 대공황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는 1945년까지를 다룬 ‘암흑의 시대’, 1950년대의 냉전과 제3세계 국가들의 해방을 다룬 ‘적색의 시대’, 영국 광부들의 파업과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쳐 아시아에서의 금융 위기까지 이르는 ‘회색의 시대’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일반적인 역사 서술과 차별되는 특징으로, 네 시기는 논리적인 영속성을 지닌다. 앞선 시기에 벌어진 하나의 사건이 뒤이은 사건과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역사란 정치와 사회, 종교와 교육, 문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따라서 이 책에서 20세기는 그 이전 시대, 혹은 앞으로 다가올 시기와 소통하면서 역사의 전망을 거시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왜 중부유럽의 제국들이 붕괴되었을까?”, “나치스 체제에 돈을 댄 사람들은 누굴까?”, “냉전의 숨은 모습은 어떤 것일까?”, “왜 노동자, 여성, 식민지인들은 사슬 끊기를 시도했을까?”,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걸프전이 의미하는 바는 무얼까?” 이 책에서는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문제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저자들은 41개 주제를 통해 20세기를 점철했던 영욕의 역사를 가감 없이 소개하고,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모순된 상황의 현상적인 측면만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갈등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설명을 시도한다. 주요 국제 분쟁, 식민제국과 식민지 독립전쟁, 1929년 대공황, 냉전, 대량 학살과 혁명, 종교, 세계화, 영화, 예술 등 20세기를 뒤흔든 사건을 예외 없이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독창적인 시선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종합해내고 있다. 일방적인 연대기적 서술 대신, 가로지르기 방식으로 접근하여 각 시대를 특징짓는 사건들에 대한 대안적 견해를 제시하며, 지도와 그래프 같은 분석 도구를 이용해 시각적 효과와 완성도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교과서나 매스미디어가 간과한 주제와 사건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생소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뉴딜 정책의 예술가 지원과 같은 주제를 다룬 점이 그렇다. 조프르 장군을 다룬 장은 ‘프랑스’ 필자들이 집필했기에 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도드라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렇듯 책은 개별 국가와 세계를, 제국주의와 현대를, 의학의 발달과 무기의 발전사를 맛깔스럽게 교차시키고 있다.

더불어 우리는 이 책에서 몇 가지 이득과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폭력이 심화되고 일상화된 21세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할 때 20세기 역사를 다룬 이 책은 그 어느 때보다 유용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역사와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난 20세기 역사가 어느 정도까지 도구화될 수 있는지, 어떻게 지배자의 교묘한 선전도구로 변신할 수 있는지, 그리하여 망각을 조작하고 새로운 지배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반면교사 역할을 한다. 더불어 이 책은 공식적으로 채택된 역사와 대비되는 새로운 관점의 역사를 들려준다.

둘째, 지배적인 사고에 저항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은 하나의 전거가 되어줄 것이다. 세계화와 맞물린 자본주의의 독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20세기 역사를 총체적으로 되새겨보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다.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전성기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가장 치열하게 탐색한 기간이었다. 좌절에 관한 지난 세기의 기록은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갈구하게 만들 것이다. 특히 ‘기억을 둘러싼 전쟁’이 계속되는 한 이 책의 의미는 오래도록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또다시 강자와 공식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하기 시작한 듯하다. 이 책은 우리에게 선택적이며 조작된 단일한 기억을 강요하는 현대적 프로파간다에 맞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셋째, 이 책은 그래프와 지도 등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내내 전쟁의 기술이 얼마나 정교해지고, 학살의 규모가 얼마나 커졌으며, 인간의 오욕이 어떻게 조직화되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과연 인간의 행복을 지속적으로 보장해주는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마주하게 한다.

넷째, 20세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역사의 종말’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개인주의적이고 소비 지상주의로 변한 현대사회에서 집단적으로 공유한 역사는 여전히 유효한 승부수가 되고 있다. 과거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곧 미래를 진지하게 꿈꾸는 행위와 짝을 이룬다. 과거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반성 없이는 발전적인 미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다룬 여러 문헌 가운데 이 정도로 교육적 성격과 정보 전달이 탁월한 책을 나는 별로 접하지 못했다. 계몽주의로부터 비롯된 이성과 진보에 대한 이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오늘날 현대인에게도 이 책은 필독서로 부족함이 없다.

각 시기에 대한 설명을 기꺼이 맡아준 한국교원대 조한욱 교수님,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휴머니스트 역사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세기가 낳은 오욕을 가감 없이 접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함께 꿈꿀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역할은 초과 달성한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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