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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의 시네마 크리티크] 살인자의 기억법 <바시르와 왈츠를>(2008, 아리 폴만)
[이대연의 시네마 크리티크] 살인자의 기억법 <바시르와 왈츠를>(2008, 아리 폴만)
  • 이대연(영화평론가)
  • 승인 2017.10.16 16: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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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음침한 동아리방이나 교내 소극장에서 은밀히 돌려보던 비디오테이프가 있다. 아마도 ‘택시운전사’가 필사적으로 운반한 영상이었을 것이다. 그 잔혹성과 끔찍함에 몸서리쳤다. 눈물과 공포에 압도되어 1980년의 광주와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따위의 질문은 진지하게 해보지 못했다. 한동안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의식에 시달렸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의감에 휘둘렸다. 
 
<바시르와 왈츠를>(이하 ‘바시르’)를 떠올리게 한 영화가 <택시운전사>나 <포크레인>은 아니었다. <바시르>가 레바논의 샤브라와 샤틸라 지역에서 자행된 학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확실히 공통점을 갖는다. 기록 필름을 외부로 운반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라든가 주인공이 광주라는 비현실적 공간으로 잠입하여 갖가지 모험 끝에 탈출한다는 판타지 서사적 구조가 기록으로서의 다큐멘터리와 환상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을 절묘하게 조합한  <바시르>의 형식적 특징을 떠올리게도 한다. 가해자 편에서 본 학살이라는 점에서는 <포크레인>과 유사하다. 
 
 
 
그런데 정작 내가 <바시르>를 떠올린 것은 <살인자의 기억법>에서였다. 김병수라는 살인마의 삶은 노년에 이르러 공허하다. 눈빛은 퀭하고 몸은 야위었다. 알츠하이머로 망각이 일상이 된 정신은 황량하다. 과거 연쇄살인마였던 그이지만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악은 사라지고 영웅만 남는다. 서사적인 맥락과 상관 없이 ‘알츠하이머’와 ‘망각’이라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택시운전사>와 <포크레인>을 소환했고 애초에 <바시르>에 대해 지녔던 막연한 혐의를 불러냈다. 
 
<바시르>는 아리 팔만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담고 있다. 레바논 전쟁 참전 당시 죽인 26마리의 개에게 쫓기는 꿈으로부터 시작해 그는 당시의 기억 중 일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동료들과 증언자들을 인터뷰하며 레바논 샤브라와 샤틸라 지역에서 강성 기독교인 집단인 팔랑헤에 의해 자행된 학살 현장에 자신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학살은 이스라엘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고, 군부의 수장이었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훗날 총리가 되었다. 
 
 
 
아리 폴만이 상실한 기억을 되찾는 방법은 인터뷰를 통해서이다. 그는 실제로 현장에 있었던 동료나 기자와의 인터뷰를 촬영한 후 이를 정리하여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계기가 된 것이 그 자신의 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터뷰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냉정하고 차분하다.
 
인터뷰이 중 한 사람인 자하바 솔로몬 박사는 ‘분리적 사건’에 대해 언급한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외부의 방어기재를 끌어들여 현실이 아닌 영화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인터뷰라는 비교적 객관적 형식을 굳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것이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아리 폴만이라는 한 개인의 내면을 추적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은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과 거리를 두기 위한 한 방편이엇는지 모른다. 내면의 탐색을 통해 무의식 속에 감춰진 전쟁의 참홈함을 들춰내는 것은 흔한 방식이다.
 
 
 
그런데 ‘나는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거나 강조할 때 그 거리는 급격히 좁아진다. 자기연민의 감정이 과도하게 노출되는 그 순간에서야 그는 비로서 당사자가 된다. 그러한 자기연민의 노출은 결말부에 다시 반복된다. 나중에 밝혀지듯이 최후까지 드러나지 않은 기억은 샤브라와 샤틸라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한 것이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는 여인들의 울부짖음과 대면한다. 그의 참담한얼굴이클로즈업 되며 애니메이션이 실제 기록 영상으로 넘어간다. 마치 황색 스너프 필름처럼 널부러지고 쌓인 시체들을 오래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제야 나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겟냐는 듯이, 내가 왜 기억을 잃을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겠냐는 듯이. 
 
학살은 이스라엘군이 아니라 레바논 팔랑헤에 의해 자행됐다. 그는 당사자가 아니며 여전히 제3자의 자리로 조금 비껴나 있다. <포크레인>에서 김강일(엄태웅)이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의 가해자로서 ‘우리를 왜 그곳으로 보냈냐’는 질문을 집요하게 쫓아들어가는 것과는 구별된다. 대신 아우슈비츠를 언급하며 전쟁과 학살에 대한 인류사적인 고찰을 시도하거나 그와 전우들의 경험과 상처에 대해 전쟁의 끔찍함을 환기시키는 어떤 보편적인 가치로 환원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샤브라와 샤틸라의 학살은 1982년의 일이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은 여전하다. 그 특수성과 개별성은 섣불리 보편화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음침한 동아리방에서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공유한 광주의 기억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망각한 기억을 되찾은 양 의기양양해 하며 몇 개의 돌을 던지고 몇 병의 술을 마셨지만 그냥 젊고, 혈기가 왕성해서였다. 나는 광주 시민도 아니었고 진압군도 아니었다. 단지 제3자에 불과했다. 광주라는 가상의 기억을 안고 정의로운 척했지만 술병 하나 만큼의 무게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망각한 기억을 찾아 인터뷰이들을 찾아다니며 과거의 사건으로 회귀하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으로 그 기록을 정리하는 아리 폴만 감독에게 질문할 수밖에. 당신은 나와 다르냐고. 미안하지만, 손가락을 다친 어린아이와 같은 호들갑은 아니었냐고. 피해자들의 시신 위에 서서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고, 나도 기억을 잃었다고, 나도 피해자라고 외치는 옹색한 항변은 아니었냐고. 
 
잃어버린 기억을 쫓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앞의 이야기는 지워지고 결말만 남는다. 이스라엘군의 살인은 지워지고 팔랑헤의 학살만 남는다. 이스라엘이 팔랑헤를 지원하고 묵인했다는 사실은 망각되고 개인의 상처만 남는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았던 증언들은 잊혀지고 끔찍한 스너프 필름만 남는다. 맥락은 사라지고 단편적 사실만 남는다. 이것이 <바시르>의 알츠하이머이자 살인자의 기억법인지 모른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이대연
영화평론가. 소설가. 저서로 소설집 『이상한 나라의 뽀로로』(2017), 공저 『영화광의 탄생』(201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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