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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마음의 계절이 바뀌는 순간 <환절기>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마음의 계절이 바뀌는 순간 <환절기>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18.02.1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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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는 시기, ‘마음의 계절’이 바뀌는 순간, 
서로의 마음을 두드린 세 사람의 가슴 아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한 계절 : 봄 
 
영화는 교통사고 현장 화면으로 시작한다. 병실을 지키는 여자의 멍한 표정 위로 음악이 흐르며 사고가 나기 전 시간을 펼쳐 보인다. 병실에 앉아 있던 여자, 미경(배종옥)은 혼자 쇼핑을 하고, 혼자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들 수현(지윤호)과 둘이 사는 집에 아들이 처음으로 친구 용준(이원근)을 데려와 소개한다. 그렇게 아들 수현과 미경 사이로 용준이 들어온다. 미경은 용준에게 잠결에 같이 TV를 볼 수 있게 거실 한쪽 자리를 내어주고, 현관문 비밀번호도 스스럼없이 알려준다. 미경은 가족이 아니면 쉽게 하기 힘든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용준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둘 사이의 적당한 거리에서 편안하게 바라봐 주며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용준은 군에 입대하기 전 미경을 찾아온다. 용준은 우울증으로 자살한 엄마와 인연을 끊고 사는 무책임한 아버지 사이에서 가족의 정이 결핍된 삶을 살아온 외로운 아이다. 말수가 적고 어두운 표정의 용준은 세심한 미경의 배려로 가족에게 받아야 했던 친밀감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 사실 용준의 인생에 수현의 사랑만큼 미경의 애정이 그리운 아이다. 미경에겐 용준이 영원히 잃어버린 엄마의 체취가 있다. 그러나 미경이 아들 수현과 용준에게 내어준 자리의 크기는 확연히 다르다. 용준이 군에 입대할 때 버스를 태워 보내며 파이팅을 외치며 웃으며 보낸다. 그러나 아들 수현이 군에 입대할 때는 부대까지 따라가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다. 그 계절, 미경에게 용준은 그저 아들의 친구 정도 친밀감을 유지하는 사이였다.  
 
몇 년 후, 수현은 용준과 함께 제대 기념으로 떠난 여행에서 교통사고를 당한다. 용준은 다리에 깁스하는 정도의 상처를 입었지만 수현은 식물인간이 된다. 아들에게 온 신경을 다 쏟아부어야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자, 미경은 용준에게 더는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거기다 예전에 미처 몰랐던 수현이 부르던 노래의 의미와 함께, 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미경은 용준의 접근조차 거부하며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친밀감마저 모두 거둬들인다.  
 
한 계절의 끝 : 늦봄
 
미경과 친구들이 모여 앉아 아들이 절대 엄마에게 해서는 안 될 세 가지를 말하는데 중요한 하나를 영화에서 무음으로 처리한다. 그때 미경은 아들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교통사고 현장에서 나온 카메라를 보다 아들이 게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교통사고 소식만큼 아들이 게이였다는 말은 엄마에게 절대 듣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미경은 의사의 말대로 “너무 희망을 갖지도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이 경과를 지켜봐야 하는” 여러 상황에 놓이게 된다. 미경은 이제 더는 참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편안하게 그냥 지켜봐 주던 모든 관계를 정리한다. 먼저 용준의 병원비를 내준 후 둘 사이를 떼어놓는다. 그리고 필리핀에서 사업하는 남편에게 “당신 다 정리하고 돌아오면 안 돼”라고 묻지만, 미경은 남편과 자신 사이에 다른 여자가 있음을 직감한다. 먼저 이혼을 제안하는 것으로 회복될 수 없는 남편과의 사이를 빠져나온다. 
 
계절과 계절 사이 : 환절기 
 
수현이 식물인간이 되어 오래 잠든 사이 용준과 미경은 혹독한 환절기를 경험한다. 목욕탕 청소를 하며 목욕탕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던 용준은 성매매로 돈을 벌어 수현의 행방을 찾아낸다. 그 사이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잔인한 시간을 보낸다. 용준은 이제 왜 나를 낳았냐고 생떼를 쓸 곳도, 원망할 대상도 완전히 사라져버린 고아가 된다. 오랜만에 만난 형도 그리고 미경마저도 용준에게 결혼하라고 한다. 지금 수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한다. 더 할 일도 갈 곳도 없어진 용준은 자살을 시도한다. 
 
미경은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퇴원하고 시골의 한 요양원으로 들어와 아들과 자신의 사이에 어떤 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한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아들 수현과 엄마 사이뿐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둘 사이로 용준이 또다시 힘겹게 비집고 들어온다. 미경은 결국 자신처럼 갈 데가 없는 용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미경은 남편과 사이가 끊어진 것처럼 아들과의 사이도 끊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용준에게 화풀이를 해대는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결국 몸살을 앓고 드러눕는다. 이동은 감독은 ”환절기는 몸의 변화도 생기고 감기도 잘 걸리는 시기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새로워지는 때다. 변화하는 계절을 겪어내는 여러 사람의 입장이 마치 환절기 같았다“라고 말한다.
 
다음 계절의 시작 : 초여름 
 
미경은 한차례 심한 몸살을 앓고 나서야, 전담 보호사도 구하고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용준은 세상에서 그나마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두 사람 곁에 남을 수 있는 작은 위안을 밑거름 삼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어쩌다 욕심이라도 내면 더 빼앗기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저 큰일만 생기지 않길 바라며, 일도 시작하고 편입도 준비하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이의 성숙 : 가을
 
계절과 계절 사이에 놓인 환절기에 겪게 되는 몸살을 그린 영화<환절기>는 대부분의 퀴어 영화와 달리 연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엄마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사랑이라는 극적인 심경의 변화를 두 연인의 관점에서 담아내기보다는 두 사람과 함께 아픔을 이겨내는 엄마의 시선으로 영화는 시적으로 아름답게 흘러간다. 용준과 수현의 연인 관계는 헤어지면 정리되는 사이지만, 그보다 인간적인 관계로 신뢰를 쌓아오던 용준과 미경 사이는 그렇게 쉽게 끊지 못할 사이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다.   
 
이동은 감독은 이 영화를 ‘받아들임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아들 수현과 용준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받아들임이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때론 이렇게 환절기 같은 시기를 거쳐야 한다.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은 환절기를 겪고 난 이후부터다. <환절기>는 한때 아름다웠고 일정한 시련도 모두 견뎌낸 사랑이지만 이 둘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낭만주의 퀴어 영화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 
 
<환절기>는 사랑을 설명할 때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혹은 누가 악의적으로 관계를 해치지 않더라도 관계가 끝날 수 있다는 내용의 퀴어 영화로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우리가 사랑의 결말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결정적으로 우리 사회가 무엇을 정상적이라고 이야기하느냐에 달렸다. 만약에 영원히 지속하여야만 정상적인 관계라면, 모든 헤어짐은 부득이 끔찍한 실패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기적인 사랑에 상상의 여지를 허락한다면, 어떤 결말은 더 깊은 사랑의 표시일 수도 있다. 관계가 영원히 지속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이 없기에 지키고 개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공정하고 관대하게 의식하면서 헤어질 것이다. 그사이 생긴 또 다른 인연들과의 사이도 굳이 끊어내지 않고 더 많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미경은 받아들일 수 없는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위해 화해하고 자신조차 무너뜨리고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미경과 용준은 혈연 이상의 깊은 신뢰와 아픔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단단한 사이가 되었다. 그 간의 퀴어 영화가 둘 사이의 열정적인 사랑을 깨기 위해 파고드는 적대적인 시선과 대칭 관계를 그려왔다면 <환절기>는 둘 사이의 외부에 존재하던 사람을 둘 사이로 끌어들여와 그 둘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시도한다. 그래서 <환절기>는 퀴어에 대한 서정적이면서 섬세한 새로운 시선 새로운 감각 새로운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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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영화평론가)
서성희(영화평론가)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