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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멸을 향한 미래적 사랑의 방식 - 토미 위르콜라 감독 <월요일이 사라졌다>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멸을 향한 미래적 사랑의 방식 - 토미 위르콜라 감독 <월요일이 사라졌다>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8.02.1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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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이야기
 
스웨덴 감독 토미 위르쿨라와 스웨덴 배우 누미 라파스가 주연한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의 원제는 ‘월요일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나?’이다. 영화는 그 원제대로 월요일(사람 이름이므로 굳이 번역할 필요는 없었지만 영화속의 ‘먼데이’)이 사라진 이유를 추적하는 액션 느와르-SF 장르 영화이다. 헐리우드 공상과학 액션영화의 흔한 분위기를 연상시킬 수도 있지만 스웨덴 감독과 배우의 북유럽적 유전자는 통속적인 헐리우드 영화와는 차별되는 철학적인 예술성을 보여준다. 북유럽 특유의, 죽음을 마주한 인간의 허무주의가 관통하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북유럽이 가르쳐주는 위대한 가르침은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것이고 그 죽음을 별스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진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두려움만을 갖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 이 교훈은 인간이란 존재를 오만하면서도 무지한 존재로 규정한 철학상 최초의 언명이다. 인간은 여러모로 중간자이다. 지식 혹은 지혜에 있어서 인간은 무지와 온전한 앎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완전히 모르는 것도 그렇다고 다 아는 것도 아닌 적당히 아는 존재다. 어떤 때는 안다고 하는게 중간이라도 가지만 어떤 때는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게 중간 가는 상황이 많다. 인간만이 제 분수를 모르고 까분다. 때와 장소를 가끔씩 망각하고 오만해 지는게 인간의 속성이다. 그 보답은 처벌이고 그것은 죽음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언명은 중요하다. 
 
영화는 죽음을 말하지만 또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르친다. 영화속에는 기이한 장면이 많다. 이 영화의 볼거리는 일곱명의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많은 장면들인데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자신의 죽은 모습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기의 모습이다. 영화 곳곳에는 죽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등장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똑 같은 모습을 한 자매의 시체를 지켜보는 다른 자매의 모습이다. 하지만 관객은 거의 같은 모습을 통해 마치 자기의 죽은 시체를 들여다 보는 또 다른 자기를 바라보는 착각을 경험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자, 그는 영원히 죽지 않는 자이다. 불멸이다. 그 장면들은 인간의 불멸을 나타내는 은유적인 장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단지 죽음이 아닌 영원히 죽지 않음, 즉 불멸을 말하고 있다. 영화는 죽음을 인정하게 하며 동시에 불멸의 희구를 담아낸다. 인간의 영원한 숙제, 불멸을 추구하고 있다. 죽음을 가두고 있는 상자같은 세상에서 불멸을 말하는 방식은 관습과 상식을 초월하는 사고이다. 제목 ‘월요일이 사라졌다’는 그런 점에서 ‘25시’, ‘제8요일’을 연상케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상의 질서를 갖다 놓은 것이다. 제목은 물론 의역이므로 시간을 단지 의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문구안에는 인간의 상실과 더불어 시간의 상실 같은 이중적 의미를 겹쳐 놓은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가능한 세상에서 불가능한 현실을 꿈꾸는 현실이탈적인 관념도 부여 하고 있으니까.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들의 세상, 즉 통제된 미래 사회다. 그 안에서 우리들은 개성 없이 하나의 이름만으로 호명되어 살아간다. 
 
▲ 일곱명 쌍둥이는 한 인간의 일곱 개 자아로 은유화된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이름이란 사회가 자기를 부르는 호명이라는 해석이 있고 난 그에 동의한다. 이 영화에서 일곱 쌍둥이가 갖고 있는 각자의 이름은 이들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 그건 그들을 불러주는 그저 ‘이름’일 뿐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 외에 정말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 영화처럼 가슴 시리게 와 닿게 만드는 영화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앙리 베르누이 감독의 <25시>의 주인공처럼 그의 자아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철저히 찢겨지고 엉망진창이 된다. 인간은 그 자체 ‘누더기로서의 자아’다. 영화는 외치며 찿고자 한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영화는 개인과 조직의 갈등을 형상화한다. 개인은 자신의 이름 너머에 있는 정체성을 찿고  싶어하고 조직은 그 방만한 개인들의 일탈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그게 개인과 조직이 대립하는 극명한 이유이다. 영화속의 소재는 1가구 1자녀이고 그것을 통제하는 조직의 법이 개인을 구속하면서 생기는 갈등이다. 이 영화는 개인과 국가의 갈등 또한 엿보게 한다. 현대사회에 올수록  국가의 존재에 대해 성찰한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이게 나라냐?’란 말이 선거담론으로 인구에 회자했었다. 이게 나라냐에 대한 질문에는 항상 그게 나라다,라는 답이 나오는게 관례다. 국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국가를 정의하는 것은 비교적 단순하다. 같은 이해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 해두자. 좀더 나아가서 영토까지를 거론하면 끝이다. 하지만 통치이념을 설명하는 헌법은 나라마다 다르고 거기에서 복잡한 국가론이 형성되는 것이다. 평등을 헌법 제 1조로 하는 프랑스, 자유를 최고가치로 삼는 미국에서, 천부인권을 중시하는 독일, 김일성주체에서 시작하는 북한, 민주적 인권을 강조하는 한국에 이르기까지 각 나라가 지향하는 이념은 다 다르다. 이 영화속의 국가는 생존을 제일 가치로 삼았다. 인구과잉이 현재 국민들의 생존을 위협하므로 그 위협세력인 다자녀가족들은 구속될 수 밖에 없다. 
 
아버지는 애초 사라졌고 어머니 존재조차 사라진 이상한 설정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일곱 쌍둥이를 마주한 할아버지의 감호하에 그들은 몰래 양육되고 특유의 비밀생존을 감행하게 된다. 마침내 할아버지 조차 사라진 미래에 그들은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되고 그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려는 정부와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건 생존전쟁이다. 개인과 국가의 갈등을 통해 영화가 말하려는 진실은 국가가 개인의 존재를 말살하려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개인의 자유를 전체의 이름으로 구속하려 한다면 그건 전체주의 국가이고 그러한 국가는 인간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는 역사적 교훈을 말하려는 것이다. 
 
개인과 국가의 갈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개인의 갈등조차 말하고 있다. 영화가 강조하는 점은 일곱명이 하나로 대변된다는 점 뿐이 아니다. 일곱명이 각각 다르게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일곱이 결국 나의 한 몸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재밌다. 하나의 머리에서 자라난 일곱 개의 머리. 희랍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다. 인간이란 존재는 양면성으로 나누면 야누스가 상징하듯 두 개지만 다수로 나누면 영화에서처럼 일곱 개 혹은 수십개의 메두사도 될 수 있다. 메두사의 얼굴을 보면 누구나 돌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가 메두사다. 영화에서 일곱 개의 이름을 갖은 쌍둥이들은 제 각각 다른 개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다양한 개성이 모여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점이다. 그게 인간이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하나로만 지칭하는 것은 무리다. 인간의 자아는 실로 복잡계여서 너무 많은 변수가 있고 너무 많은 개성으로 인해 속이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카렌 셋맨이란 하나의 이름 아래 일곱 개의 다양한 개인이 은닉해 있다는 설정은 그 자체 인간의 복잡한 자아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선데이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러한 자기 혼란은 극중인물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 역시 동일하게 느끼는 지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른다. 영화는 그 사실을 직시하게끔 유도한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관객들은 자기가 자신을 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인간은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한다. 사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르며 그걸 알기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이란 바로 앎을 사랑한다는 말 아닌가.
 
▲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말살해선 안된다는 교훈
 
먼데이가 사라진 이유를 알기 위해 맹렬하게 달려가는 생존자들. 일곱명의 인격체를 일곱 개의 자아로 생각하면 관객들은 이들의 이야기가 한 인간의 이야기 일수 도 있음을 알게 된다.그리고 그건 바로 관객 자신 개개인이 된다. 일곱 개의 다른 개성은 우리 머리와 마음속에 존재하는 일곱 개의 다양한 사고방식이다. 그 안에는 서로 상충하는 개념들도 있다. 심사숙고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면도 있다. 자기가 살고자 남을 해하는 성격도 있지만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살리려는 지혜로운 성격도 있다. 영화는 그런 다양한 면을 한 인간이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가치를 고양시킨다. 
 
생존을 향한 부단한 욕망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를 꿈꾸는 인간의 노력이다. 불멸의 가치를 향한 쉼 없는 전진과 배려는 인간만이 행하는 높은 의미의 행동이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가치로 설명한다면 이 영화의 사랑이야기는 고귀하고 참다운 의미를 갖는다. 먼데이를 살리려 했던 다른 자매들의 행동도 사랑이지만 죽는 순간까지 먼데이가 취했던 행동 또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인간이란 존재가 단순하지 않고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정재형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영화이해의 길잡이], [영화영상스토리텔링100] 등의 역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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