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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공포로 사랑 그리기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공포로 사랑 그리기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18.06.1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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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시작과 끝.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한 삶의 무게가 소리 없는 세상을 짓누르고 그 무게가 더 해지는 만큼 가족의 연대는 견고해진다. 

 
레건(밀리센트 시몬스)의 ‘소리 없는 세상’은 ‘소리가 있어서는 안 되는 세상’과 충돌하고 그 경계에는 아버지 리(존 크래신스키)와 엄마 에블린(에밀리 블런트)이 있다. 1시간 30분 정도되는 러닝 타임에서 한 시간 즈음이 지난 후에야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이 이상한 영화는 특이한 주파수로 끔찍한 괴물을 제거하고 극복하는 과정 속에 우리를 우겨 넣는다. 더욱이 이 들은 오늘날 과잉된 ‘소음’에 정확히 반대되는 세상, 즉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남는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영화의 공포를 어느 정도 공감하고 긴장감에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는 세상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의무감에 정확히 공감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영화<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소리를 내야하는 본능과 소리를 억제해야하는 의무가 충돌하는 세상에 대한 모험이라고 결론지어도 좋을 것이다. 감각에 대한 의미라기보다 우리가 행해야하는 본능과 금지해야만 하는 의무가 충돌하는 삶에 대한 고통.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이런 맥락을 담아 절묘하게 만들어낸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소리에 민감한-도대체 어디서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는- 괴물과 평범한 가장의 충돌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요컨대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단지 좀비가 나올법한 상황에서 좀비 대신 기괴한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감각 하나(소리, 발성)를 지워버렸을 때 재현할 수 있는 빤한 이야기를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괴물’이니 ‘농아’니 하는 말들은 세상의 은유로 존재하는 우리를 가리키는 말로도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장애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에 의한 삶의 재해석을 의미 한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 누구나 환경적으로 수화를 써야 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감각본능을 늘 점검해야할 일을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게 된다. 우선 그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본능적으로 내뱉을 수 있는 비명 내지 예기치 못한 소음에 대처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감각본능을 재정의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자기 스스로는 분명히 소리를 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요인 혹은 타인에 의해 발생하는 소리로 인하여 내가 꼼짝없이 죽을 수도 있을 상황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알게 되는 것은 나의 목숨유지는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 나의 목숨은 타인에게 종속돼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공포가 가진 문제는 나의 의지적 문제를 벗어나 나의 목숨은 타인에게 완전히 종속될 수도 있다는 어떤 극단적 위험과 불안함이다. 
 
나의 생존은 누군가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 즉 삶의 지속은 결국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바로 이것은 특히 에블린이 갓 낳은 아들을 통해 가장 명료하게 부각되는데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할 상황은 바로 그 이후에 나타난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레건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개발하고 있던 보청기의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괴물’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인지하게 된다. 이는 의존적 의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이유를 내 스스로는 인지하기 어렵거나 인지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 아니면 오히려 해결책은 나와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한 채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남겨놓는다. 나의 삶이 유지되려면 무엇보다도 나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미를 묘하게 전해준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상호관계를 통해 삶을 유지하는 모습은 어쩌면 아버지 ‘리’가 ‘레건’에게 수화로 전달했던 ‘사랑’의 메시지일 것이다. 물론 진정한 가족애와 유대관계라는 너무도 빤한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만큼은 생사를 건 매순간의 긴장감과 공포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절박하게 경험하게 되는 극단적 사실을 가족과의 사랑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일종의 독트린과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형성된 관계가 공포스러운 모습을 고어적 표현으로 그려낸 슬래셔 무비 스타일의 끔찍함 속에서도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의 모습보다는 끔찍한 괴물의 난데없는 등장과 그것이 남겨놓은 끔직한 모습이 기억에 강하게 각인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그려내는 서사 속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처절하게 담아내기보다 의존적 삶을 깊이 있게 그려내고, 이에 더해 오히려 진정한 삶의 의미는 자기 자신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며 그 메시지를 충실하게 재현하려 한다. 이것이 소위 가족 간의 사랑이 가진 중추이며 공포가 사랑을 그리는 백미다. 
 
그래서 나는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가족의 사랑을 공포와 고어라는 펜으로 써 내려간 빤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 영화는 너무 뜬금없이 시작하고, 갑작스럽게 끝을 맺으며 이전 맥락에 대한 설명에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영화의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는 여전사가 된 것처럼 묘사된 에블린의 모습 때문도 아니고, 드디어 괴물의 약점을 이해하게 된 레건에 감정이입이 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공포의 발악으로도 사랑을 멋지게 재현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공포를 통해 사랑을 설득하는 과정을 보게 된 빤하지만 이상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불편함이 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속에는 내뱉지 못한 숨 속에 공포와 사랑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폭포 소리에 묻혔던 아버지 리와 아들 마커스(노아 주프)의 속 시원한 외마디 비명이 너무도 잘 설명해준다.
 
글·지승학
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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