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황무지》(The Waste Land, 1922년), T.S. Eliot/황동규 옮김 -
사월의 감성은 황무지로 열린다. 시인은 명사의 동사 이야기로 《황무지》를 시작한다. 명사는 라일락, 추억과 욕정, 뿌리, 겨울. 동사는 키워내고, 뒤섞고, 깨운다, 따뜻했다. 우리 삶은 라일락의 꽃과 향기~추억과 욕정의 교차로~뿌리의 순환으로 향해가며 따뜻한 겨울을 꿈꾸는 시간 여행이다. 침묵의 봄을 떠나 소리의 봄으로 부활하는 사월은, 엘리엇의 봄보다 따뜻하다.
사월의 / 라일락은 / 삶 시작 / 원형력 상관물
우리 삶은 봄날의 라일락 같은 태어남으로 시작한다. 라일락(Lilac)은 꿀풀목 물푸레나뭇과의 낙엽 활엽 소교목으로, 품종에 따라 흰색·연보라색·붉은 보라색 등의 꽃이 피는데, 보라색 계통이 가장 흔하다고 한다. 꽃에서 나는 향기가 좋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관상수이다. 라일락은 그 꽃과 향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낸다.

존재감은 대상이나 사물이 본디의 꼴로써 갖고 있는 근본이나 원인이 되는 그 무엇이다. 막연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다른 모습이 내면에 있는 것을 아는 것, 수많은 낯선 것들이 자신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깨닫고 표현하는 것. 이는 곧 원형력을 의미한다. 사월의 원형력이 라일락의 마음으로 들어온다.
꽃피는 마을인 피렌체(Firenze). 원형력을 캐고 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년~1564년)를 만난다. 미켈란젤로가 조각가로서 남긴 작품 가운데 상당수가 미완성이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노예상이다. 당초 열두 명의 노예를 조각하려던 그는 <큰 덩이 머리 노예>(Atlas), <젊은 노예>(Young slave), <잠에서 깨어나는 노예>(Awakening slave), <수염 난 노예>(Beared slave) 등의 노예 연작(Slaves, 1513년~1532년?)을 미완성으로 남긴다.

완벽한 원근법과 정밀한 묘사 등으로 오만의 끝을 보여주는 당시의 르네상스 미술과는 다른 모습이다. 노예 연작의 미완성 이유를 생전에 언급한 적이 없지만, 연작으로 불릴 만큼 여러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겼다는 것은 미완성의 특성을 이용한 완성의 추구는 아니었을까? 노예 연작 중 특히 <큰 덩이 머리 노예>(Atlas) 등 위의 네 점은 조각을 하는 도중 중단한 듯한 모습이다. 노예의 형체만을 드러낸 채, 돌덩어리 부분이 조각의 완성을 위한 손길과 호흡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인 <피에타>(Pieta, 1498년~1499년)와 <다비드>(David, 1501년~1504년) 등과는 달리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것은, 노예의 성격을 더욱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한 ‘논 피니토(non finito, 작품을 의도적으로 미완성으로 남겨놓는 기법)’는 아닌지.
미완성 속에서 대상에 대한 또 다른 완성을 본다. 노예를 조각하고 있었다면 미처 끝내지 못한 미완성작이지만, 돌덩어리에 갇힌 노예를 해방한 것이라면 완성작이다. 미완성 속에서 인간 불완전성에 대한 또 다른 반성을 본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인간 행태의 한계에 연민하며, 노예처럼 돌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을 차마 모두 끄집어낼 수 없는 고뇌의 표현이다. 그에게 조각이란, 돌을 특정한 형태로 깎는 것이 아니라 돌 속에 갇혀 있는 형상을 캐내어 꺼내 주는 것이다. 이는 곧 원형의 추구로써, 대상에 대한 진정한 완성을 위해 원형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라일락의 원형을 햇살과 바람이 캐내어 끄집어낸다. 보라색 꽃과 향기가 우리를 만난다. 죽은 땅에 갇혀 있던 우리의 원형도 라일락을 향한 꿈을 꾸며, 봄날의 시간을 미완성으로 바라본다.
DNA / 성장기에 / <골콩드>(겨울비)가 / 뒤섞이고
라일락의 꽃과 향기를 원형으로 간직하며 우리의 DNA(Deoxyribo Nucleic Acid)가 성장해 간다. DNA의 성장은 추억과 욕정의 교집합이며, 과거와 현재의 시간 함수이다. 미래는 불확실하므로 현재의 연장일 뿐이다. 추억은 과거로 가고, 욕정은 현재로 온다. 과거가 중력이라면, 현재는 반중력이다. 중력(gravity)은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상호 인력으로 수렴의 성격을 갖는다면, 반중력(anti-gravity)은 다른 자연계의 반대되는 것에 의해 중력이 무효화 되는 힘으로 발산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익숙함이 중력이라면, 낯섦은 반중력이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년~1967년)의 그림은 소재와 표현 수단 간 경계와 부조화, 낯섦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주로 주변에 있는 대상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요소들을 작품 안에 배치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일상적인 관계에 놓인 사물과는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초현실주의 방식인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중력과 반중력의 공간적 배치를 통해 익숙함과 낯섦을 표현한 그의 그림 중 <골콩드>(Golconde, 1953년, 일명 ‘겨울비’)가 있다.

골콩드는 19세기 후반까지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유명했던 인도 남부의 도시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엘도라도'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폐허 속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림의 제목은 과거의 추억을 소환하는 중력의 역할을 하며, 그림 속 중절모의 신사들을 쏟아낸다. 사월의 검은 겨울비로 내리며, <골콩드>는 반중력의 세 가지 서사를 펼쳐낸다. 첫째,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골콩드의 욕망을 좇아 굵고 가는 비가 되어 하늘에서 떨어진다. 붉은 지붕의 베이지색 건물과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내려온다. 골콩드의 폐허는 허무와 무의미로 연결되며 여우비 되어 하늘로 떠오른다. 둘째, 그림의 제목 외에는 그림 속 구성 요소들이 서로를 끌어당겨 주는 중력이 없다. 검은 물질로 치장한 외형은 비슷해 보이지만 동작과 시선은 각각 다른 신사들의 모습. 공중을 떠다니는 신사들을 통해 파편화된 인간의 소외와 다른 듯 같아져 가는 DNA의 획일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셋째, 공간의 무한 확장 구성을 통한 발산형이다. 공중에 크게 그려진 신사들을 점으로 여기고 직선으로 연결하면 정삼각형과 평행사변형이 그려진다. 위아래와 오른쪽 끝에 그려진 신사들은 일부분 잘려져 있어 화폭이 확장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우리가 삶의 초기조건인 원형을 유지하며, 추억과 욕정이 과거와 현재 시간의 함수로써 조화를 이루는 공놀이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를 향한 시공간의 중력과 반중력이 균형을 이루며 공은 떨어지지 않고 삶의 궤도를 계속 돌며 지름을 넓혀 나간다. 이는 중력과 반중력의 변증법적 게임이, 추억과 욕정이 뒤섞이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 여행 속에서 어우러져야 하는 이유이다.
순환형 / 삼중주 소리 / 엘리엇 봄보다 / 따뜻하네
원형을 간직한 DNA 성장의 길은, 잠든 뿌리를 깨우며 유기체의 본질 속을 찾아 흐른다. 본질의 흐름은 계절의 선순환과 더불어 일어난다. 봄비에 열린 뿌리는, 가지와 잎을 통해 골콩드의 시공간까지 채색하며 겨울눈으로 닫혀간다. 계절의 선순환 따른 시공간의 흐름은 삶~쉼~죽음의 삼중주 속 카덴차(cadenza, 협주곡에서 반주를 멈춘 동안 화려하고 기교적인 애드리브 혹은 그 풍을 살린 연주를 통해 독주자의 역량을 과시하는 대목). 삼중주는 생명력으로 이어지며 미래의 현재 진행형을 꿈꾼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년~1918년)의 그림 중에 생명력의 현재 진행형을 보여주는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 1909년).

중앙에 서있는 나무는 나선형 줄기를 자랑하며 뻗어나간다. 마치 봄비를 맞은 잠든 뿌리가 깨어나 하늘을 향해 춤추는 듯하다. 중력을 거스르는 발레리나의 꿈을 닮은 나무의 생명력이, 같은 듯 다른 나선형 순환을 거듭한다. 동일한 순환의 형태를 띠지만 나선형은 원과는 다르다. 원은 단순히 같은 크기의 순환을 반복하며, 다른 원들과는 상호 떨어진 단절형이다. 나선형은 확대와 축소, 상승과 하강을 아우르며 상호 연결되어 있다. 내부와 외부를 향한 변화와 성장의 여백까지 포함된 순환이다. 순환을 향한 변화의 방향마저 공유하는 연결형 순환이다. 나무 오른쪽 중간에는 검은 새가, 포옹의 충만함으로 넘쳐나는 연인들을 향해 앉아 있다. 검은 새는 죽음을 나타낸다. 황금빛을 배경으로 한 생명의 나무에 죽음의 새가 한 알의 열매로 열려 있는 듯하다. 생명은 언제든 날아가거나 떨어져,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리라. 살아 있음의 완성은, 유기체적 생명이 죽음으로 흘러간 자리에, 새로운 것이 채워지는 순환성에 있다. 나무 본래의 꼴은 유지하되, 태어나고 죽는 것과 흐르고 변하는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순환이야말로 생명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봄비가 잠든 뿌리를 깨우는 것은 순환을 위한 또 다른 시작이다. 삶은 순환과 순환으로 이어지는 통로 속에서 나선형 매듭을 지어간다. 나선형은 상하좌우의 상반되는 힘이 교차로에서 만나며 충돌할 때 생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은 다양한 힘겨루기의 소용돌이 장(turbulent field). 이는 침묵으로 떠다니는 사월의 봄이, 나선형으로 진화해 가는 생명력을 흔적으로 그려가야 하는 이유이다.
《황무지》로 인해 억울한 사월의 선죽교에 정몽주(1337년~1392년)의 봄비가 내린다.
春雨細不滴(춘우세부적) 봄비가 가늘어서 방울도 짓지 못하더니
夜中微有聲(야중미우성) 한밤중에 가느다란 소리가 귀에 들리네.
雪盡南溪漲(설진남계장) 눈 녹아 남쪽 시내에 물이 불어나니
草芽多少生(초아다소생) 새싹들이 많이도 돋아날 거야.
- 《봄비》(春雨), 정몽주 -
돋아난 새싹과 캐낸 꽃들이 부르는 원형력~중력과 반중력~생명력의 노랫소리가 커져 온다. 사월은 그 소리만큼 엘리엇의 봄보다 따뜻하다.
글·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 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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