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이동을 다루는 최근의 영화로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시리즈가 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 각각 2022년과 2024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감독의 앞선 흥행작 <전우치>(2009)에서 출발한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 외에도, 도술을 부리는 도사와 신선이 등장하고, 인물들이 ‘검(무기)’을 손에 넣으려 고군분투한다는 설정은 두 영화가 공유하는 지점이다. 감독이 스스로 <외계+인> 시리즈의 설정이 <전우치>에서 출발했다고 밝히기도 했듯이, <외계+인> 시리즈와 <전우치>는 꽤 많은 지점을 공유한다. 그런데 <외계+인> 시리즈와 다르게, <전우치>는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가 2009년의 서울과 그로부터 500년 전의 조선시대라는 서로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에서 인물은 시간을 거슬러 오가지 않는다.
같은 모습으로, 공간을 오가는 인물들

그러나 <전우치>의 관객들은 영화의 인물들이 시간을 오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먼저, 인물의 설정(특히, 외양)에 비결이 숨어있다. 화담(김윤석 분)을 비롯한 세 신선은 모두 5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다. 그들은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같은 모습’으로 죽지 않고 살아있다. 전우치(강동원 분)와 초랭이(유해진 분)는 500년 전 그림 족자에 봉인되었다가 500년 뒤인 현대에 풀려나고(역시 같은 모습으로), 서인경(임수정 분) 또한 같은 모습으로 환생한다. 환생한 서인경을 제외하면, 이들은 조선시대에서 2009년으로 점프하듯 이동한 것이 아니라 계속 살아있던 셈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들은 마치 영화에 제시되지 않은 시차적 간격을 뛰어넘은 것처럼, 따라서 시간을 이동한 것처럼 느껴진다.
다음으로, 영화 속 인물은 초월적인 이동을 하지만, 그들은 시간을 오가는 대신 공간을 오간다. 공간여행을 위해 필요한 장치는 그림으로, 이들은 그림 족자, 촬영된 사진 이미지, 광고 포스터, 그리고 스크린을 넘나든다. 그림은 단지 문(입구 또는 출구)일 뿐만 아니라 통로이기도 하며, 목적지(또는 플랫폼)이기도 하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기와 대문 또한 공간 이동을 위한 장치다. 그것이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화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포털(portal)의 형상과 닮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우치와 서인경이 화담을 피해 도망치기 위해서 만든 이 문에는 ‘空間移動(공간이동)’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문을 통과해 도착한 곳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다른 장소(영화 세트장)다.
예리한 관객은 <전우치>가 시간 이동이 아니라 공간 이동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재빠르게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렸음에도, 영화가 시간을 오가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장면의 배치를 통해 효과적으로 이를 성취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전우치>가 시간여행을 다루는 대표적 사례인 <백 투 더 퓨처>(1987)와 유사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우치>는 개봉 당시 관객의 현재와 일치하는 2009년에서 시작되어, 곧장 과거로 향한다. 2009년 서울의 한 병원에서 시작되어 (과거에는 신선이었으나 현재에는 중인) 남자(송영창 분)의 회상에 따라 500년 전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식이다. 그리하여 약 40분에 걸쳐 과거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나면, 다시 처음의 장소인 2009년의 서울(병원)로 돌아온다. 이는 (앞선 글에서 살펴본) <백 투 더 퓨처>의 전략과 유사하다. 영화는 개봉한 당시 관객의 현재와 일치하는 1987년을 배경으로 시작되어, 미래로 이동하는 대신 곧장 과거로 이동함으로써 현재를 ‘미래’로 전환한다. 이는 <백 투 더 퓨처>가 효과적으로 관객의 몰입을 자아내며 전환의 효과를 성취했던 지점이다.
반복을 활용하는 <전우치>의 장면들
이에 더해, 영화는 몇 가지 장면에서 반복을 이용해 독특한 시간성을 자아낸다. 하나는 요괴를 쫓던 화담이 별안간 날아온 화살의 주인을 알아차리는 장면이다. 화살의 주인이 전우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전우치의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한동안 이어지던 전우치의 이야기는 다시금 앞선 장면을 반복한다: 그가 쏜 화살이 화담을 향해 날아가고, 화담이 날아온 화살의 주인을 알아차리는 장면 말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앞선 순간의 이후라고 여겼던 순간들(전우치와 초랭이의 이야기)은 사실 미래가 아니라 과거였음이 드러난다. 이는 시간의 흐름을 갖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예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시작에서 끝으로 나아가는 영화의 전개상,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상,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전에 나온 장면을(앞선 장면을) 과거로, 이후에 나온 장면을(다음 장면을) 미래로 인식한다. 별다른 장치가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화담이 화살의 주인을 알아차리는 장면’의 반복을 마주하는 순간, 즉, 같은 장면을 두 번째로 보게 되는 순간, 그 장면을 처음 마주한 뒤에 이어진 장면들(전우치와 초랭이의 이야기)은 ─사실상 그 이후에 펼쳐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아닌 과거로 판명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다른 하나는 전우치가 잠에서 깨어 스승의 안부를 묻는 장면이다.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했던 이 장면은 ─약 1시간 30분의 긴 시차적 간격을 가지고─ 스승과 초랭의 타박까지 그대로 이어지며 영화의 후반부에서 반복된다. 따라서 영화가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서 관객들은 갑자기 다시금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옮겨간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러한 지점이야말로 <전우치>의 성취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압권인 순간은 반복된(두 번째) 장면에서 전우치가 스승의 말을 대신하는 순간이다. 즉, 전우치는 스승이 곧 할, 그러나 아직 하지 않은 말을 미리 안다. 따라서 그는 정확하게 스승이 할(will say) 말을 대신 한다(says): “요괴하고 다투질 않나…” 곧이어 전우치가 마당에 있는 ‘이미 깨진’ 항아리를 발견하면서 이 장면은 가짜임이 드러나고(1), 스승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는 전우치의 대사(“스승님은 여기까지 봤구나”)를 통해 관객들은 비로소 원래의 자리를 되찾는다. 다시 영화의 후반부로 돌아오는 것이다.
영화가 ‘이미 깨진’ 항아리를 통해서 원래의 자리를 되찾는 지점은 특기할 만한데, 이미 깨져버린 항아리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즉 원래의 상태로 완벽히 되돌릴 수 없는 것(사건이자 흔적)이기 때문이다. 항아리의 ‘깨짐’과 같은 사건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와도 같다. 우리는 항아리가 깨진 사건을(또는 순간을) 기점으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한다: 깨지기 전과 깨지고 난 후로 말이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모든 순간을, 또는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 없다. 심지어 시간은 흐르지 않으며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살아가기) 위해 부여한 규칙일 뿐이라는 최근의 논의를 떠올려 보라. 우리는 어떤 계기적 사건 또는 순간을 통해서 비로소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고 나아가 일련의 순간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의 순간을 이행의 일부가 아니라 독자적인 사건으로 발견하는 일이다.(2)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거창한 것일 필요는 없다. 전우치가 마당에 널브러진 ‘이미 깨진’ 항아리를 통해 그의 현재가 반복된 것임을 알아차린 것처럼 말이다.
반복을 이용한 장면은 또 있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 치매 노인의 대사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별안간 맞이한 화담의 최후는 최초로 실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반복된 듯한 인상을 주고, 그제야 관객은 잊고 있던 치매 노인의 대사를 떠올리게 된다. 헛소리로 여겼던 그것이 예언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에는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전환의 감각이 내재한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미 지나간 과거(영화 초반의 장면)의 숨겨진 가치와 진정한 의의가 드러나고, 이를 통해 관객은 뒤늦게서야 과거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흔히 경험하는 것이 아닌가? 중요한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이루어지고, 깨달은 시점에 그것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래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앞날을 미리 알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는 대체로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렇듯 ‘때’의 불일치는 인간 운명의 으스스함과 불가해함을 암시한다. 이러한 점에서 치매 노인의 대사는 단순한 복선 그 이상의 효과를 성취한다.

<전우치>는 이미 흥행에 성공하며 대중과 평단 모두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영화다. 이전 작품들로 입증된 감독의 역량은 물론이거니와, <전우치>의 캐릭터와 전개 방식, 세부적인 설정들에서도 나아갈 방향과 갈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우치>는 2024년 현재에도 (여전히) 새롭다. 한국 영화의 맥락 속에서도, 감독의 필모그래피 내에서도 말이다. 어쩌면 이점이 당시 <전우치>에 ‘한국형 히어로의 탄생’이라는 문구가 붙었던 이유가 아닐까? (이러한 명명이 결과적으로 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서 <전우치>의 성취가 <외계+인> 시리즈에서 충분히 녹아나지 못한 것을 아쉽다고 하기에는 다소 성급하다. <외계+인> 시리즈가 <전우치>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는 했지만, 엄연히 그것과는 다른 별개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전우치>에서 뻗어나간 하나의 갈래가 <외계+인> 시리즈라면, 또 다른 갈래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우치>에서 치매 노인의 대사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언젠가 우리는 <전우치>를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고, 이미 지나간 과거로서 영화의 가치와 의의는 다시금 조명받을지도 모른다.
(1) 마당에서 ‘이미 깨진’ 항아리를 발견한 전우치는 스승이 남긴 말을 떠올려 거문고 갑을 향해 활을 쏜다. 그 즉시 스승과 초랭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거문고 갑에서는 활에 맞은 화담이 뛰어나오며 그것이 가짜였음이 드러난다.
(2) 슬라보예 지젝은 칸트를 인용하여 “도식화된 시간 속에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그 어떤 것도 출현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즉, 현재는 과거에서 미래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을, 그리고 원인에서 결과에 이르는 인과의 논리를 “순간적으로 중지시키는 어떤 사건에 의해 일깨워”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 이성민 옮김 (서울:도서출판b, 2005), p.77-78.
글‧김윤진
영화평론가/미술비평가.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GRAVITY EFFECT 미술비평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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