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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애도를 위한 제의<아침바다 갈매기는>
[이승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애도를 위한 제의<아침바다 갈매기는>
  • 이승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5.01.0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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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공적인 부분은 우리 안의 유령을 해방시키는 데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단계이다.1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하고 살아남은 이를 구해내기 위한 제의의 영화다. 영화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닷가의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한편의 영화적 제의다, 라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영화에는 죽음만이 아니라, 귀신, 묘지, 저주 등 죽음에 관한 주술적 말들이 가득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거나, 살아있다 해도 죽은 사람처럼 생기가 없다. 생기, 생명성, 온기,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의 활력 같은 것은 영화의 어디에도 없다. 또는 이런 것. 영화에는 지나가듯 언급되었을 뿐이지만(‘몇 년 전에 배 뒤집힌 일’)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에서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를 읽지 않기란 힘들다. 이 조차도 무리한 해석이라고 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만든 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독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이 영화를 ‘제의’로 읽어야 할 필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025년 벽두, 신년의 첫 영화 비평을 쓰고 있는 지금, 다시 마주한 대한민국의 집단 참사 앞에서 우리가 아직 충분히 떠나보내지 못한 것들의 귀환을 보고 있거니와 이 영화가 대신 소리 내어 응어리 진 것들을 풀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제의를 통해)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오는 영화이고, 살아남은 자식을 구해 내보내는 영화이다. 

 

구명시식-살아남은 자식을 구해내려는 영국의 제의

영화에는 몇 개의 불가해한 장면들이 있다. 이상하리만치 섬뜩하고 불가해한, 이상해서 제의 혹은 주술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 그리고 여기엔 영국(윤주상)이 틈입한다. 어촌 마을 촌부 선숙과 마을 부녀자들 몇 명은 남편을 잃은지 얼마되지 않은 베트남 출신의 영란(카작)과 함께 북어를 다듬는 작업을 하다가 영란이 받게 될 보험금에 대해 언급한다. 영란은 남편인 용수 앞으로 그의 모친인 판례(양희경)가 들어놓은 사망보험의 보험금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돈이면 베트남에 가서 부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이니 수색에 나선 자기들에게 나눠달라는 짓궂은 농이다. 이때 지나가던 형락이 영란의 편에서 말을 보탠다. “그게 지금 남편 잃은 사람한테 할 소리요? 어촌계라고 만들어놨더니 하는 짓거리들 하고는... 마을공동체? 이게 공동체요? 공동묘지지.” 방언을 터뜨리듯 강한 어조로 이들을 비난하자마자 형락은 선숙 일당에게 공격을 받는다. 영국과 같이 있던 경찰이 신고를 받아 싸움이 난 현장에 도착했을 때, 형락은 기둥에 묶여 매를 맞은 후였다. 이 장면에 깃든 공포는 다만 폭력성뿐만이 아니라, 야만성에 기인한다. 이 장면의 야만성은 마을이 어느 시대에 위치해 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전근대적이다. 지난 시대의 사람들이 사는 마을, 혹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마을, 그야 말로 ‘공동묘지’같다. 

경찰차에서 내린 영국은 피투성이가 되어 기둥에 결박된 채 몸부림치는 형락의 모습을 본다. 형락이 폭행을 당하는 현장에 경찰과 같이 있던 영국이 간다는 설정은 서사의 흐름상 아무런 필요가 없다. 수색을 지속해달라고 요구하는 판례가 아니라 외려 수색 중단을 바라는 영국의 입장에선 더욱이 경찰과 붙어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서사가 아닌 영화적 이미지의 요청에 의해 삽입된 장면이다. 경찰이 도착해 포박을 풀어주자 형락이 이를 악물고 “죽을 때까지 생선 배나 따다 뒈져버려라, 귀신같은 새끼들!”이라고 퍼붓는다. 형락의 말이 섬뜩하게 들리는 이유는 이 저주가 감정적으로 내뱉는 악담이 아니라, 진짜 인간성과 온기를 상실한 자들에 대한 더 없이 정확한 표현이라서다. 형락은 인간성을 잃어버린 귀신들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자다. 

 

이후 영국과 같이 춘천에 다녀온 영란에게 판례는 영국이 ‘서울 가겠다’던 둘째 딸 설희를 ‘까벗겨 기둥에 묶어놨’고, 분에 못이긴 설희가 다음 날 저주의 말들을 퍼붓고는 목매달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어촌계 회장으로 뽑아놨더니’ 서울로 갔던 형락은 ‘죽을 수가 없어’ 다시 어촌으로 낙향한 인물이다. 그런 그를 영국이 불러내어 뱃일을 하게 되었다. ‘놀고 있던 애를 데려다가 15년간 뱃일을 가르친’ 용수가 영국의 유사 아들이라면 용수의 뒤를 이어 뱃일을 하게 된 형락도 아들의 자리에 가는 것이 된다. 그런 형락이 지금 기둥에 묶인 영국의 둘째 딸 설희의 모습을 하고선, 방언이 터진 듯 죽기 직전 설희가 그랬다던 것처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이 장면에서 형락은 죽기 직전의 설희의 모습을 재연하고 대신 넋두리를 하는 제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로 나갔다가 귀환한 형락은 도시와 어촌의 중간에 있는 중간자이며, 설희와 영국을 잇는 매개자이다. 그렇기에 형락은 ‘여기 것들이’ ‘귀신새끼들’임을 알아보고, 이곳 어촌 마을이 ‘애진작에 끝난’ ‘공동묘지’라는 것을 안다. 용수가 판례의 집에 돌아오는 날 영국이 형락을 술집으로 불러내어 ‘나 좀 도와줘야겠다’며 주먹질을 하는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제의의 퍼포먼스이다.

예테보리 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영자막이 삽입된 버전의 프린트로 국내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형락의 입에서 어촌마을의 폐쇄성을 비난하는 방언이 터져나올 때, 이 대사가 영화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자막을 통해서다. “마을공동체?”라는 한국어 음성과 함께 떠오른 자막은 “A Community?”다. 다시 말해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영화적 형상화이다.

이 질문은 세 가지 질문을 뭉뚱그려 놓은 것이다. 첫째, 그 공동체의 이름은 무엇인가. 둘째, 그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셋째, 그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어촌 마을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 사회에 대한 제유다. 즉 저출산으로 인해 아이가 없는 초고령 사회, 그에 따라 인력과 일자리가 없어 점점 쇠퇴하고 빈곤해져 가는 지역, 노동력과 출산을 대신하기 위해 유입된 외국인에 대해 차별과 갈등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다문화 가정의 문제 등을 겪는 한국이라는 사회. “A Community?” 그러니까 ‘한국 사회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를 묻는 영어로 된 이 질문은 이 영화의 영어제목인 <A Land Of Morning Calm>와도 조응한다. ‘아침 해가 뜨는 나라’라는 명칭은 외부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명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외부에서 온 이방인인 영란의 눈에 비친 한국이라는 사회에 대한 묘사이다. 동시에 ‘아침’이라는 단어가 환유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을 자조적으로 부르는 ‘헬조선’의 ‘지옥’이다. 

 

여기 이 장소가 영란에게 다름 아닌 지옥임을 알려주는 장면은 또 있다. 용수의 사망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닐하우스에서 잔업을 하던 영란은 혁수에게 ‘영주권을 위해서라면 남편으로 등록해 줄 수 있다’는 희롱의 말을 듣는다. 이 때 이 장면(이 지닌 폭력성)은 너무도 끔찍해서 혁수가 영란의 얼굴을 만지려고 손가락을 영란의 뺨에 가져다 댈 때, 마치 징그러운 벌레가 뺨에 닿기라도 한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는 영란의 불쾌감은 객석에까지 전달될 만큼 강렬하다. 이 장면에서 혁수의 행동이 끔찍한 이유는 그의 행동이 단지 성희롱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행동에 담긴 양면성과 위선 때문이다. 혁수는 용수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장 적극적으로 수색에 협조한(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인물이다. 그래서 ‘판례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심어주지 말라’는 영국에게 얼굴을 붉히고, 수색 때문에 조업을 못했다는 이유로 어판장의 경매인들에게 칼부림까지 가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진짜 용수와 ‘형, 동생 하는 사이’의 의리 때문에 폭력을 저지른 것이라면 용수의 아내인 영란에게 못된 마음을 품었을 리 없다. 결국 혁수가 벌인 일련의 폭력들은 ‘의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는 그저 맹목적인 폭력일 뿐이다. 폭력과 위선, 차별과 적대만 남은 어촌 마을은 인간성이 상실된 곳, 인간다움과 생명성이 고갈된 그야말로 ‘공동묘지’다. 

불가해한 일은 바로 다음 순간에 일어난다. 혁수의 손가락이 영란의 뺨을 스치고, 희롱당한 영란이 놀라 일어나는 순간, 마치 이 상황을 지켜보기라도 한 듯이 화가 난 영국의 목소리가  비닐하우스 밖에서 영란을 불러낸다. “영란아, 영란아!” 다급한 호명에 밖으로 나온 영란과 영국이 함께 도착한 곳은 용수의 사망신고를 하러 간 주민센터다. “왜 여기서 이런 대접을 받고 살어?” 영국은 영주권을 받지도 못하고 추방당하게 생긴 영란의 딱한 처지에 화가 나서, 이제 그만 용수의 사망신고를 하고 보험금을 받으라고 고함을 지른다. 비닐하우스 장면에서 영국이 영란을 다급하게 부르는 것은 영란을 위기에서 구출시키기 위한 호출이자, 동시에 죽어가는 이를 깨워 구해내려는 절박한 호명처럼 들린다. 말하자면 구명시식.(救命施食: 병든 사람을 위하여 귀신에게 음식을 주고 법문을 알려주는 의식)

 

결국 영화 전체에 걸친 제의를 통해 영국이 하려는 것은 이 ‘공동묘지’에서 영란을 구해서 살려 내보내는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가두는 바람에 목매달아 죽어버린 둘째 딸 설희 대신, 어촌 마을에 가둬진 영란을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는 죽은 자식 대신 대리인(유사 딸)을 살리는 것으로서 딸에게 속죄하기 위함이다. 영란은 베트남에서 온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외부에서 ‘도래’하므로, 곧 ‘미래’에서 오는 자이기도 하다. 온통 죽은 자들뿐인 귀신들의 공동묘지, ‘과거’의 고장에서 유일하게 ‘미래’인 영란을 구해내는 일은 공동체의 유일한 희망을 살려내는 일이다. 이것이 영국이 이 이상한 보험사기극에 공모해 곤혹스런 제의를 기꺼이 치러내는 이유다. 영국이 큰 딸을 만나러 간 춘천에서, 영국의 둘째 딸을 닮은 ‘순희의 딸’과 영란이 만나는 장면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도무지 어울리지도 않고 연관관계도 없는 듯 보이는 두 사람은 뜬금없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마주본다. 순희의 딸이 영란에게 치킨 한 조각을 건네고 영란의 큰 눈을 들여다보며 부럽다고 말하는 이 장면은 영국의 죽은 딸 설희와 영국의 새로 맞은 (유사) 딸 영란이 서로를 들여다보며 투사하는 장면이다. 

 

진혼-죽은 자식을 불러내려는 판례의 제의

빅토르 에리세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오데트>(칼 드레이어의 1955년작, 죽은 엄마가 딸의 믿음으로 부활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내용의 영화) 이후 기적은 없다.”고 말했지만,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영화에 기적이 있다고 믿는 영화다. 불가능한 기적이 일어나는 기적을 일으키려는 영화다. 판례는 용수의 사고가 일어난 이후 매일 바닷가에 앉아 용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판례는 영화 내내 용수에 대한 ‘수색을 멈추지 말라’고 외친다. 그리고 용수가(혹은 그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용수의 사망신고를 철회할 것을 영란과 경찰에게 요구한다. 수색은 충분히 이뤄져야 하고 매장은 올바르게 치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요구하는 절규의 시다림(尸陀林: 죽은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는 불교의식)을 행하는 이가 판례다. 그런데 어쩐지 이 외침은 영화에서도 언급된 ‘배가 뒤집혀’ 죽은 사람들, 즉 세월호를 떠올리게 한다. 

 

‘국민이 바다에 빠졌는데 수색을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 행정력의 무능과 공공시스템(콘트롤타워)의 미비로 인해 제대로 수색과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는 어디에 있(었)는가. 국가의 부재는 유족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집단 트라우마를 남겼다. 바다에 빠져 죽는 사고를 다룬 다음에야 한국인 관객이라면 상당수가 지니고 있을 집단 트라우마를 피해갈 수는 없다. 피해서도 안된다. 판례의 울부짖음은 상처를 입은 채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위로이다. 동시에 애도란 개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위로로써만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국가의 행정 시스템과 공동체의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외치는 통렬한 제의이다.

결국 제의를 통한 애도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살아남은 유가족을 위한 것이고, 동시대에 살아 나아가야 할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용수가 영란이 아니라 영국과 판례다. 두 사람은 각자 용수의 부모이자 영란의 부모이고, ‘자식이 죽어봐서’ 아픈 마음을 공유하며 살아갈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들이 주인공인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애도를 행하는 주체이자 대상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생존자 장애진씨의 아버지이자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총괄팀장인 장동원씨는 “유족들이 원하는 형태의 분향소가 이제야 꾸려졌다고 해서 오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 때도 희생자가 생존자가 됐다가, 생존자가 희생자가 되는 등 (사고 수습 과정에) 혼란이 컸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 같아 답답하다”면서도,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당장 손을 내밀기보다, 이태원 참사 때 그랬듯 그분들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함께하며 각종 대응부터 기록을 남기고 진상을 규명하는 전반적인 과정에 힘을 보탤 수 있게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2025년 1월 1일 한겨례 기사)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참담함이 얼마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전하고 싶어 내려왔다”며 "재난 참사는 겪지 않은 분들과 공감대 차이가 크다"며 "참사를 겪은 가족끼리 연대하고 공감하며 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트라우마 치유의 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 1일에는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소속 유가족 30여명이 무안국제공항을 찾아 조문하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2025년 1월 3일 파이낸셜뉴스 기사)

 

영국과 판례는 영화 내내 화가 나있다.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영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들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어떤 이유로든 화가 나있다. 용수의 사망사고가 일어난 이후부터 치닫기 시작한 영국과 판례 두 사람의 감정의 파고는 점점 극에 달한다. 죽은 자식을 불러내려는 판례와 살아남은 자식을 내보내려는 영국의 시다림(尸陀林: 승려가 상가(喪家)에 가서 죽은 사람을 진혼하기 위해 염불과 설법을 하고 의식을 집례하는 일.)이 폭풍처럼 격랑을 일으킨다. “용수 살아있다.”는 영국의 말을 판례는 믿지 않는다. 용수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판례는 그제야 비로소 용수가 죽었다고 믿는다. 격랑은 잦아들고 비로소 두 사람의 제의는 끝난다. 그러자 용수가 돌아온다. 그리고 돌아온 용수는 다시 영란과 함께 떠나간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결말은 해피엔딩인가?

 

용수가 집에 돌아오는 장면은 기이하다. 검은색 후드티셔츠에 달린 모자를 걸쳐 쓰고 영국 쪽으로 걸어오는 용수의 모습은 마치 유령처럼 흐릿해서 이들 부부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는 예측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판례가 있는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클로즈업되는 판례의 표정만으로는 아들이 살아 돌아와서 기쁜 것인지, 귀신을 보고 놀란 것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는 관객이 어느 쪽으로도 상상할 수 있게 열어놓은 영화적 환영술이 들어있다. 영화는 끝까지 용수와 판례가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용수가 돌아왔는지는 사실 끝끝내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영화의 결말에 관해선 세 가지 상상이 가능하다. 첫 번째 상상은, 영화의 서사대로라면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줄곧 살아있던 판례의 아들 용수가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는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영영 떠났다는 것이다. 두 번째 상상은, 영화 속 판례의 입장에서라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용수가 살아 돌아와 희망이 있는 나라로 가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상상은 영화<아침바다 갈매기는>이 죽은 자를 위한 제의라는 가설에 따라, 용수가 실제로는 (그물에 걸려 바다에 빠졌을 때) 죽은 것이고 용수의 혼을 달래는 판례의 기도에 따라 저승으로 편안히 떠나갔다는 상상이다. 죽음의 파토스와 정념으로 가득한 이 영화에 감독은 희망의 씨앗을 숨겨 놓았다는 인터뷰를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죽었던 이가 살아서 돌아와, 희망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살게 된다는 쪽을 믿어보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오독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영화가 부리는 주술을 통해서라도 죽은 이들이 살아서 귀환할 수 있다는 기적을 믿어보려고 한다. 살아남아 있는 우리들은 결국 슬픔을 공감하고 애도를 나누며 살아가야 할 조용한 아침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므로. 

 

1.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아듀 데리다』, 최용미 역, 인간사랑, 2013, 89쪽

 

글·이승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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