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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2024> : 브루탈리즘으로 관통한 1950년대 해체와 재영토화
[김 경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2024> : 브루탈리즘으로 관통한 1950년대 해체와 재영토화
  • 김 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5.02.17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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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회(2024년) 베네치아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작 <브루탈리스트(The Brutalist), 2024) 는 배우이자 감독인  브레이디 코베이가 연출했다. 실존 인물처럼 묘사한 허구 인물, 헝가리안 아메리칸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를 통해 전후 1950년대 아메리칸드림의 시간과 공간을 소환한다.

 

영화<브루탈리스트> 포스터

브루탈리즘: 해체와 재영토화 그리고 재건과 치유 

이 영화는 헝가리안 아메리칸 ‘브루탈리스트’ 라즐로가  5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위선과 모순 그리고 전쟁 트라우마로 가득한 자신을 해체하고 재영토화하는 과정이다.

‘브루탈리즘’과 ‘브루탈리스트’를 영화의 씨줄과 날줄로 삼은 것, 제목에 소재와 주제를 압축하고 결합해서 영원성과 정체성이라는 문양을 도드라지게 하는 방식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혹이다.

1950년대 미국 사회라는 공간과 시간은 브루탈리즘과 라즐로를 통해 영화의 스타일과 내러티브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관통한다.

브루탈리즘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어로 노출 콘크리트를 의미하는 베통 브뤼트(B ton brut)에서 유래됐으며, 이는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1950년 전후 재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빠른 시공과 경제성을 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이 드는 콘크리트를 가공하지 않고 사용하는 건축 양식이다.

 

브루탈리즘 건축이 체화된 라즐로

이 영화에서는 미국 이민자로서 라즐로의 삶에 체화된 건축양식이기도 하다. 대략 몇 가지로 세분해보면, 첫째, 전후 ‘재건’의 의미다. 거시적 역사와 건축양식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 이민자 라즐로라는 한 개인사를 통해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재건’하고자 고군분투한 1950년대 이민사의 역사적 상징성이다.

둘째, 미(절대 선)에 대한 기준을 흔들고 재정의한다. 기존의 보수적 가치를 흔드는 미적 기준을 새로 세우는 ‘재영토화’의 의미다. 라즐로가 뉴욕에 도착하는 영화 도입부의 ‘자유의 여신상’은 거꾸로 뒤집히거나 사각 앵글로 잡힌다. 그가 어둡고 흔들리는 배에서 내려 처음 본 자유의 여신상은 라즐로의 시선을 통해 이미 재영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암울한 유대인 학살에서 살아남아 ‘자유’의 땅에 왔지만 그가 마주칠 신대륙의 자유는 복잡다기하고, 모순투성이다. 그가 자본주의와 자본가의 땅에서 모순과 위선을 해체하는 과정은 녹록치 않다. 자본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의 존재는 이 과정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는 라즐로를 가난에서 구원하고 재능을 알아보지만 그를 이용하고 멸시하며 성적으로도 착취한다.   라즐로와 해리슨 사이에 가로놓은 견고한 힘의 역학 관계는 해리슨이 라즐로를 강간하는 장면에서 처절하게 도드라진다. 건축가의 자부심이 자본의 힘 앞에서 위협받는 모습은 잔혹하다.

셋째, 모더니즘이 정직한 건축이라면 브루탈리즘은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다고 한다. 장식적인 디자인보다 건축자재와 구조적인 요소가 그대로 노출되는 브루탈리즘처럼 라즐로와 해리슨의 치부도 모두 노출된다. 매춘과 마약 그리고 호모 섹슈얼리티와 강간까지. 날 것 그대로 드러난 진정성이 라즐로의 미덕이라면 라즐로를 통해 숨겨진 욕망이 드러난 것은 해리슨의 몫이다.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은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해체된 앙상한 골조는 재영토화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지만 관객은 이 잔인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넷째, 이민자의 사회가 이민자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미국은 이민사가 역사다. 깃발을 선점한 자가 다음 도착자를 포용하거나 짓밟는다. 혹은 짓밟다가 어쩔 수 없이 포용한다. 이민자와 함께 수많은 양식과 삶의 양태가 함께 들어왔고, 브루탈리즘도 그 수많은 경우의 한 가지 예시일 뿐이다.

다인종과 다 문화가 모두 하나의 솥에 담긴다. 이 영화에서 AI를 동원해 다듬었다는 헝가리안 아메리칸 악센트도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처음에는 서로 알아듣기 힘들고, 낯설어서 거슬리다간 혼재되고 받아들이며 정착된다. 영화 1부의 이민 정착기에 유대인도 헝가리안 악센트도 불편했다면 중간 휴식에서 숨을 고르고, 2부에서 라즐로가 건축가로서 공공건물에 대한 기여를 통해 안착한 후쯤이면 관객은 어느덧 이 타자의 정체성을 포용하게 된다.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브래디 코베 감독은 "1950년대 브루탈리즘 건축물이 세워졌을 때 많은 사람이 철거하길 원했다"라며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움받기 쉬운 브루탈리즘 건축물이 이민자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라는(2024년 9월 9일, 할리우드리포터 브래디 코베 감독 인터뷰) 설명은 이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브루탈리즘은 ‘거대한 순수’라고 볼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거칠지만 멀리서 보면 이 거대한 순수의 조형미가 장대하게 압도한다. 라즐로의 내밀한 개인사는 거칠고 불안하지만, 그가 고집스럽게 품고 있는 정체성과 자긍심은 그의 건축물을 통해 순수하고 장대한 결정체로 형상화된다. 이 영화는 스펙타클한 콘크리트 건축물뿐만 아니라 이러한 건축 양식을 제유적으로 드러내는 선과 면의 미장센에서도 조형미를 놓치지 않는다.

 

1950년대 소환을 통한 영화적 성취  

오프닝 시퀀스에서 라즐로가 필라델피아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달리는 장면의 경우 미장센은 매우 상징적이다. 길은 화면 위의 공간으로 상향 운동하며 스태프 이름 그래픽은 화면 왼쪽으로 흘러 십자가의 형상으로 강하게 충돌한다. 이 속도감과 방향성은 이후 그가 지은 밴 뷰런 센터의 대리석 제단에 내려와 비치는 빛 십자가와 같은 형상이다. 이 영화에서 강조하는 조형적 충돌은 하늘의 빛과 땅의 길이다.  라즐로는 빛을 통제하는 천정에 집착하며 헝가리언 아메리칸 건축가의 정체성을 향해 타협하지 않고 (빛 십자가),  전진(도로와 기찻길의 상향 운동)한다.

 

돔 천정의 수직빛과 가로의 라운지 의자
돔 천정의 수직 빛과 라운지 의자가 만드는 십자가

라즐로가 해리슨의 서재 리모델링을 통해 보여준 조형미 역시 돔 천정의 교체와 커튼을 이용한 빛의 통제, 장대한 수직면에 담긴 실용적 서고에 내리쬐는 돔 천정의 빛 아래에 가로로 놓인 라운지 의자( 뉴욕 휘트니 뮤지엄을 설계한 헝가리 출신 부루탈리스트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를 참고했다는 마르셀 브로이어 B35 의자)가 만들어낸다. 라즐로가 건축과 디자인을 통해 구원받는 것을 암시하는 십자가는 여기에서도 반복된다.

미국 최초의 장편 영화 <국가의 탄생>(그리피스, 1915)이 장편 영화에서 4권(약 40~50분)이 주류였던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12권(상영 시간 2시간 45분)이었던 충격에 비견될 3시간 35분 상영시간은 물론이고, 15분 ‘중간 휴식’을 의도적으로 배치해서 복고적 분위기를 가져오면서도 신세대의 취향을 고려한 영리한 마케팅 전략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무성영화 시절처럼 프롤로그와 1부, 휴식 그리고 2부와 에필로그로 단락을 나눈 것이나 1950년대 향수를 복원한 비스타비전 70밀리 필름 촬영은 탁월한 전략이고 용기다.  브레이디 코베이 감독과 스튜디오 A24의 대담한 선택은 브루탈리즘의 정신을 영화 형식에 성공적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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