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8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은 <옥자>(2017), <설국열차>(2013)뿐만 아니라 복제인간과 우주 식민지 개척을 다룬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1982), <더 문>(던컨 존스, 2009), <아바타>(제임스 카메론, 2009), <정이>(연상호, 2023) 같은 SF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미래는 기술 발전과 변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두려움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화남, 짜증, 그리고 안도 같은 보다 일상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자연스럽게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게 만든다.
<미키 17>은 감성보다는 이성을 자극하는 영화다. 2054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려지는 세계는 현재와 다르지 않다. 현재에서 상상한 미래를 담은 영화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빌런인 마샬 부부는 현실 속 특정 인물들을 떠올리게 하고, 영화가 던지는 논의 가능한 이슈도 여럿이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주인공 미키 17을 중심으로, 영화 속 미래가 현재에 던지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영웅 대신 극한 직업인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전형적인 영웅은 찾아보기 어렵다. <살인의 추억>(2003)의 무대포 형사, <괴물>(2006)의 한강 매점 가족, <옥자>의 시골 소녀, <기생충>(2019)의 가족들까지.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리더나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려는 사람들이다.
미키 17 역시 다르지 않지 않지만, 더 극단적이다. 그는 인간복사기를 통해 복제가 가능한 ‘익스펜더블’로, 16번이나 죽고 복사되면서 인류의 우주 식민지 개척에 투입되어 궂은일을 해왔다. 그동안 우주 방사능 연구를 위해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었고, 정착 준비를 위해 외계 행성에서 미지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으며, 백신 개발 과정에서 부작용으로 반복해 죽어왔다. 하지만 그러한 임무를 수행한 이유는 사명감이나 희생정신 때문이 아니다. 그저 계약했기에,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복제인간도 인간인가?’ ‘인간이 신인가?’ 같은 거대한 철학적·윤리적 논쟁이 아니다. 대신, ‘그렇다고 그들을 소모품 취급해도 되는가?’ ‘그들에게 저런 일을 시키고, 필요하면 죽게 해도 되는가?’라는 보다 구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우리가 현실에서도 반복해서 마주하는 갑질과 착취의 구조와 닮아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익스펜더블’한 존재들은 이미 존재한다. 특정한 계층이나 직업군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역할을 하지만, 쉽게 대체 가능하다는 이유로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런 현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미래가 그려졌지만, 결국 현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분노보다 순응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미키 17의 지나치게 낮은 자존감이다. 그는 자신에게 극한 상황을 요구하고 소모품 취급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심지어 외계 생명체 크리퍼가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줬을 때조차,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맛이 없었나?"라고 자조한다. 미키 17은 자신의 처지에 크게 분노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들은 자신이 복제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주 식민지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더 문>의 샘 벨 역시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한 후, 자신이 수많은 복제인간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깨닫고 깊은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미키 17은 애초부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계약 내용을 꼼꼼히 읽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익스펜더블'이 되기로 선택하고 서명한 만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새삼 길고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미키 18이 등장했을 때도 잠시 혼란을 느끼지만, 그것은 존재론적 질문이나 분노라기보다는 여자 친구 나샤에 대한 질투에 가까워 보인다.

다른 영화들처럼 강렬한 각성의 순간도 없다. 미키 17이 크리퍼에게 죽은 줄 알고 복사된 미키 18은 분노를 표출하지만, 결국 (잠시지만) 서로에게 칼을 들 뿐이다. 금기시되는 ‘멀티플’ 미키 17과 미키 18의 공존이 문제라 인식했기 대문이다. 그러나 '둘 중 누가 진짜 미키인가?'라는 고민도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 이미 나샤는 그동안의 미키들을 모두 ‘미키’로 인정하며 함께해 왔고, 17과 18은 연대한다.

결국 고민은 관객의 몫이다. 주인공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보다는, 그가 놓인 상황 자체에 대한 현실적 고민을 만나게 된다. '계약을 통해 선택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가 옳은 것일까? '누가 진짜 미키인가?' 보다는 '이대로 살아도 되는가?'라는 보다 현실적인 고민이 남는다.
이 질문은 영화 속 미래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에도 계약이라는 틀 속에서 침해되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 노예 계약, 순응하는 삶, 그리고 강요된 시스템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미키 17은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의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미키 17>은 한 개인의 정체성 고민을 넘어, 시스템 속에서 길들여져 분노하기 보다는 순응하는 현재 세상의 일면을 그려낸다.
이러한 연출은 <미키 17>이 감정을 격하게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라, 거리감을 두고 이성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라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
<미키 17>은 감정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영화가 아니다. 감정적 이입을 막는 이유 중에는 영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흐르는 미키 17의 목소리, 내레이션이 자리한다. 그는 섬뜩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고, 때로는 농담처럼 가볍게 넘긴다. 심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태도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자존감 낮고, 순응하는 극한 직업인이다 보니, 그가 겪어온 일들이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한다.
내레이션이 길게 등장하는 장면은 주로 회상 장면이다. 익스펜더블이 된 사연, 그리고 이후 상황이 정리된 후 해결 과정이 편집된 영상과 함께 내레이션으로 요약되면서, 마치 무용담처럼 전달된다. 격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기도 전에 이미 정리된 결말을 듣게 되니, 감정 이입의 여지가 줄어든다. 한마디로 매우 쿨한 요약본 같다. 이로 인해 관객은 미키의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처한 현실을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희망의 가능성도 제시한다. 다만, 그것은 기존 SF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던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인물들의 각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지, 그리고 빌런을 다루는 방식이 기존 SF와 어떻게 차별화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다.
이미지 출처: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글·송영애
영화평론가. 서일대학교 영화방송공연예술학과 교수.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교육 관련 연구를 지속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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