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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독일어권 극작가 중 한 명으로, 세계 연극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을 쓴 비영어권 극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연극, 드라마, 배우 훈련에 관한 글을 쓰면서 배우와 관객이 함께 예술의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깨닫게 한 연출가이기도 하다. 1917년 뮌헨대학교 의대에 입학한 브레히트는 한 학기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1924년경 활동지를 베를린으로 옮겨 연극작업에 본격적으로 매진하였다. 이후 그는 1928년 <서푼짜리 오페라>를 통해 독일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서 급부상하게 되었다.
망명의 시작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독일의 연립 내각 수상이 되었다. 그리고 수상은 곧바로 국회 해산을 당시 독일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에게 요청하였다. 1933년 2월 27일, 독일 베를린에 있는 국회의사당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나치는 이것을 공산당의 폭동을 위한 신호라고 주장하면서, 독일 사회의 지식인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고 견제하였다. 나치의 파시즘을 감지한 브레히트는 1933년 2월 28일 독일을 급히 떠나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3년 5월, 나치는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덴마크에서 미국까지
덴마크는 브레히트가 처음으로 망명한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나치 체제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작품을 집중적으로 창작하였고, 이는 반파시즘 예술운동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5년 6월 8일, 그의 독일 국적이 박탈되었다. 브레히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에는 스웨덴과 핀란드로 이동하였고, 1941년 소련을 거쳐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였다. 당시 로스앤젤레스는 나치 점령 유럽에서 온 망명자들에게 피난처와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 때문에 망명자들은 로스앤젤레스를 ‘태평양의 바이마르’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브레히트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HUAC)에 소환되어 좌익 성향을 이유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브레히트는 공산주의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으나, 이 소환 조사는 그의 예술 활동에 큰 제약으로 작용하였다.
독일로의 귀환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인 1947년, 브레히트는 스위스로 건너간 뒤 1948년 동독 정부의 초청을 받아 동베를린에 정착하였다. 스위스의 취리히 극장은 브레히트가 핀란드와 미국에 망명하는 동안 그의 작품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사천의 선인〉, 〈갈릴레이의 생애〉를 초연한 곳이기도 하다. 동독에서는 그에게 극장 베를리너 앙상블을 제공해 주었는데, 여기서 브레히트는 전후 독일의 문화 재건을 주도하며 〈도시 건설자〉와 같은 작품을 통해 파시즘 청산과 민주적 사회 건설을 모색하였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점에 독일이 파시즘에 굴복한 후 폐허가 된 상황에서 ‘좋은 건설’의 원칙에 따른 독일 사회와 문화 재건에 관한 브레히트의 제안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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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파시즘 운동으로서의 연극
브레히트의 반파시즘 투쟁은 문학과 연극을 통해 시도되었다. 그는 연극이 감정에 동화되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 ‘서사극’의 원칙을 확립하고 예술적 실험과 자유로운 사상을 추구하였다. 망명지 덴마크에서 1938년에 집필한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을 보면, 나치 치하의 일상적 폭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파시즘 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서 독일의 현실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도록 다큐멘터리 요소를 반영하였고, 개별 장면 분석을 통해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방식은 관객이 수동적 관찰자가 아닌 비판적 사고의 주체가 되게 하려는 목적에서 비롯하였다. 브레히트는 망명 중에도 편지와 시, 작업 일지를 통해 나치즘의 본질을 분석하고 독일에서 망명한 지식인 사회와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브레히트의 유산
브레히트는 1956년 8월 14일 베를린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예술을 통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실험적 연극 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나치의 파시즘에 의해 시작된 브레히트의 망명, 그리고 전쟁 종결과 함께 이루어진 그의 귀환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을 넘어, 예술가가 시대적 아포리아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서 평가받는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예술의 실천적 가치와 그것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이것이 특정 시대와 지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오늘도 우리는 역사가 현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현실 속에서 배우고 있다.
글·임형진
상명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전공 교수. 극단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 대표 및 상임연출가. 독일문화와 예술, 수행성의 미학, 포스트드라마 연극에 대한 연구 및 예술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제5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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