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 결정을 내렸다. 모든 시선이 텔레비전 속 ‘탄핵심판 결정문’ 문장 하나하나에 고정된 그 순간, 며칠 전 관람했던 영화 '승부'가 문득 떠올랐다. 조훈현과 이창호, 한국 바둑사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단순한 스포츠 전기가 아니었다. 영화 속 두 인물이 바둑판 위에서 서로를 향해 던지는 수(手)들이, 민주주의라는 긴 호흡의 대국을 벌이는 시민의 모습과 겹쳐졌다. 치열한 승부의 과정 속에 담긴 성찰, 갈등, 계승 그리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까지-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

‘승부’는 전설적인 바둑기사 조훈현 9단(이병헌)과 그의 제자이자 또 다른 전설이 된 이창호 9단(유아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인물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대와 기풍, 전통과 혁신이 부딪히는 가운데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만나게 된다. 한 시대를 이끈 절대자의 권위가 어떻게 무너지는가. 새 시대는 어떤 방식으로 옛 것을 넘어서며 무엇을 계승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경쟁 속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영화는 1989년, 조훈현이 세계 바둑대회인 제1회 응씨배에서 우승하고 금의환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시 그는 국내 기전 전관왕을 세 차례나 석권한 바 있는, 말 그대로 바둑계의 ‘황제’였다. 그러나 그의 전성기 뒤편에는 1984년, 단 한 수로 조훈현의 눈을 사로잡았던 아홉 살 소년 이창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훈현은 그를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 정반대 성향의 싹”이라 표현하며 내제자로 들인다.
조훈현의 바둑은 기세를 중시한다.
“실전에선 기세가 8할이야. 기세에서 밀리면 안 돼.”
그는 빠르고 공격적인 수로 상대를 압도한다. 반면, 어린 이창호는 계산적이며 신중했다. 상대가 공격해 와도 즉시 반격하지 않고 물러서며 전체 판을 바라보는 바둑을 두었다. 조훈현은 그런 그를 천재가 아닌 ‘둔재’로 여겼다. 기억력도 약해 복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겉으로는 무덤덤한 반응만을 보였다.
하지만 그 ‘둔재’는 곧 다른 철학을 선보인다.
“선생님, 그런데 이렇게 두면 만약 잘못되었을 때 역전될 수 있습니다.”
1%의 패배 가능성조차 두려워하는,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의 태도. 이창호는 상대를 무너뜨리기보다는 지지 않는 길을 택했고, 결국 ‘보이지 않는 강함’으로 스승을 위협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국수전 타이틀전에서 사제가 정면으로 맞붙는다. 긴장 속에서 펼쳐진 마지막 대국. 이창호는 반집 차이로 조훈현을 꺾는다.
이때 바둑계는 이 승리를 ‘보은(報恩)’이라 불렀다. 바둑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이겼을 때, 그것을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궁극적 응답으로 본다. 가르침을 완성했기에 가능한 승리, 그리고 진심으로 마주하는 존경의 표현. 이 영화의 첫 번째 승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관계의 전환이자 철학의 교차점이다.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타이틀을 하나 둘 잃어가는 조훈현의 모습은 단순한 인간의 노쇠함을 넘어선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집중력이 흐려지는 가운데 그는 스스로 ‘1인자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음을 체감한다.
“도리 없지. 이것이 승부이니까.”
진심 어린 이 대사는 패자의 회한이 아니라, 승부라는 삶의 본질을 직시하는 태도다. 그리고 조훈현은 다시 이창호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1991년, 두 사람이 다시 국수전 결승에서 만난다. 이번엔 5번기. 제한시간 5시간씩, 총 10시간을 다 쓰고, 초읽기만 2시간이 넘는 혈투 끝에 조훈현이 6집 반 차이로 승리한다. 복수가 아닌 공존의 승리, 그것은 '패배 이후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는 순간이다.
실제 조훈현과 이창호는 1988년부터 2003년까지 무려 69번의 타이틀 매치를 벌였다. 세계 바둑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제 간 경쟁이자, 두 천재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준 세기의 대국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꺾고 밀어내야 하는 라이벌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깊이 이해하는 동반자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걸고 최선을 다했고, 기풍은 다르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최적의 모습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했다.
이 영화는 결국 ‘승부’가 무엇인지 되묻는다. 그것은 단지 이기고 지는 일이 아니다. 혼신을 다해 상대와 자신과 싸우는 과정을 넘어 상대를 존중하며, 다음 수를 고민하는 것. 그래서 영화 승부는 바둑판을 넘어, 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최근 몇 년 사이, 두 번의 탄핵을 겪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최근 윤석열 대통령을 둘러싼 탄핵 정국. 두 사건의 전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민주주의는 바둑처럼 민주시민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민주주의 가치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다. 각자 다른 모습으로 노력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직접 바둑판 위로 올라선 것이다.
“창호가 그랬듯이. 이제 제가 창호한테 도전해야죠.”
이 대사는 바둑의 복수전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영화는 그것을 ‘성찰의 계승’으로 읽게 한다. 스승이 제자가 되고, 제자가 스승이 되는 순환. 이처럼 민주주의 역시 완결이 아닌 과정이다. 시민이 도전자가 되고, 때로는 수호자가 되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판관이 된다.
한국 바둑이 두 바둑 거장 이후에도 영화에서 다루지 않은 이세돌 9단과 같은 후대 바둑기사들에 의해 계속 발전하고 있듯이 우리 민주주의도 계속해서 발전해 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승부’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묻고, 응시하고, 수를 둬야 한다. 그 한 수가 사회를 바꾸고, 우리의 미래를 바꾼다. 그것이 곧 우리 모두가 놓아야 할 ‘다음 수’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의 자세일 것이다.
*스틸 컷 및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글·이윤진
문화평론가|ESG연구자 겸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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