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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야당의 경계성(liminality): 영화 <야당>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야당의 경계성(liminality): 영화 <야당>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5.04.0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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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넘지 못한 상상력 (개봉일: 2025년 4월 16일)

*약간의 스포일러성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환각제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해악은 차치하더라도 영화에서 그것을 다룰 때는 이상하게 활용하는 클리셰가 항상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촉매제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늘 주인공을 초인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자로 환원하여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애매한 상황에 놓인 캐릭터의 서사적 당위성을 부여한다. 술이 되었든(취권) 이상한 약물이 되었든(마녀) 진짜 환각제이든(리벤지) 이 모든 것은 영화일 뿐이라는 인식을 지렛대로 삼아 다른 차원의 힘으로 재인식하게 만든다. 영화가 자주 차용하는 이런 설정들은 스펙타클 뿐만 아니라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현실 극복의 대리만족을 늘 표상한다. 이러한 중간자적인 위치가 이번에는 육체를 넘어 정치사회 속에 위치한 중간자의 상황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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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야당>의 서사는 한국 사회에서 양날의 검으로 작동하는 검사 권력 시스템 안에서 그 행로를 개척한다. 거기에 피해자로서 스스로 자력구제를 할 수밖에 없는 사적 원망의 스토리들이 덧붙는다. ‘스토리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적어도 3명의 인물이 그 일에 연루되어 있어서다. 그들의 원망과 복수는 믿었던 만큼 되돌려준다는 앙갚음을 원료로 삼아 감행된다. 하지만 늘 그렇듯 가해자는 법을 보호막으로 삼는다. 이것은 이제 한국영화의 보편적인 복수 서사의 논리가 되었다.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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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야당>에서는 이런 사적 원망을 당한 만큼의 피해를 되돌려주는 공적 복수에 투입한다. 환각제 특히 마약 문제는 그 일의 출발선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마약은 두 종류로 나뉜 느낌이다. 이강수(강하늘) 개인이 극복해야 하는 마약과 별개로 구관희(유해진) 검사가 극복해야 하는 마약이라는 권력 때문이다. 먼저 이강수의 마약은 마약범죄에 우연히 휘말리게 되어 조사를 받던 중 구관희(유해진) 검사에게 발탁되어 이른바 ‘야당’이라는 중간자의 역할을 이강수가 맡게 되면서 시작된다. 야당은 마약 유통 조직에 개입하여 정보를 빼내거나 수사에 협조하는 자를 일컫는 속어로써,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닌, 법, 관습, 계급에 의해 지정되고 배열된 위치들 사이에 놓인 중간자로서의 존재를 의미한다. 하지만 공익차원의 일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명분을 갖고 있으나 범죄에 실제 가담한 적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언더커버 수사관과는 약간 다르다. 그리고 결정적인 또 하나의 이유, 그것은 모순적이게도 마약을 다루되 마약의 유혹에는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금기다. 그 금기는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구관희(유해진)검사의 입에서 나온다.(영화에서 그는 이강수에게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라고 권하기는 한다.)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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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구관희 검사의 마약이라는 권력. 이는 사실상 복수 서사의 더 근본적인 대상이 된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금기를 이강수에게 전한다.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서일까? 그는 마약 같은 출세욕에 중독되어 주변인들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일을 반복한다. 그런 그의 보호 속에서 가장 악마처럼 행동하는 자는 유력 대권 후보자 아들 조훈(류경수)이다. 조훈은 이강수와 달리 구관희의 경고와 금기를 대놓고 무시한다. 그에게 금기를 전할 수 있는 자는 유력 대권후보자인 그의 진짜 아버지일 것이지만, 영화에서 그 아버지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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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야당>의 힘은 그런 관계가 서로 물고 물리는 과정의 긴장감과 빠른 전개에서 출발한다. 이는 영화 초반의 몰입도를 상승시킨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의 힘은 거기까지다. 이 영화는 중간자로서의 위치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을 포착했음에도 결국 안정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이를테면 현시점에서 영화 <야당>을 볼 때 구관희가 연상케 하는 인물들은 여럿 있다. 그들은 모두 공분을 일으킨 자들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갖는다. 마약 범죄자들의 잔혹한 폭력장면들은 그런 그들의 사회적 행태들에 비견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권선징악이라는 클리셰를 결국 깨지 못한다. 그건 현실 속 그들의 악행에 영화적 상상력이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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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야당>에서 지적할 수 있는 아쉬운 점은 결국 순진한 판단으로 치닫고 마는 영화적 결말의 안전한 그 선택이다. 이런 비판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사회는 그보다 훨씬 더한 소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이 제작사의 압력 탓이라거나, 이른바 창고 영화여서 몇 년을 묵히다 나왔기 때문에 시의성을 반영하지 못한 탓이라거나 아니면 감독의 상상력 부족 탓이라고 입바른 말로 얼버무리더라도 분명한 것은 구관희의 조작 수사가 마약 사범들의 패악질 못지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현실은 영화적 상상력을 확실히 넘어섰다.

그런 아쉬움에도 이강수의 복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복구하기 시작했다는 결과를 낳는다. 복수 서사가 현실의 일부를 들춰낸 셈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 적용되는 마약의 정치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식으로 이 영화 <야당>은 마약에 연루된 중간자를 통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활성과 더불어 사회적 중간자로써 법, 관습, 계급의 이상한 경계성(liminality)을 그려낸다.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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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상재 역의 박해준은 <폭삭 속았수다>의 금명이 아버지 이미지를 차용한 느낌이 강하여 캐릭터가 겉도는 느낌이다. 반면 엄수진 역의 채원빈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이강수와 오상재가 어이없게 희석시킨 원망과 복수의 농도를 끝끝내 유지시킨다. 사회적 중간자로서의 경계성은 잘 그려내고 있지만 캐릭터의 경계성은 그에 미치지 못한것 같은 이 영화 <야당>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에서 국선변호인의 수임료를 30만원이라고 까발린 그 명배우, 황병국 감독이 13년 만에 연출한 영화다. (2025년 4월 16일 개봉)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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