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선 그 무엇도 괴물이 될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기준 삼은 무언가와 비교할 무언가가 서로 조금 다르다면, 그 다른 것에 관해 괴물이 될 명분과 배경을 주장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는 그만큼 ‘다르다’는 것에 관한 혐오와 우려가 턱 끝까지 차오른 세상에 살고 있기도 하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괴물이라는 개념의 성립 조건은 ‘다름’이 정의되고 구체화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와 마주하는 괴물은 무엇인가? 어쩌면 진부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있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AI는 언제나 인류에게 괴물 같은 존재로 여겨져 왔다. 어느덧 일상의 화두로 자리잡은 지금뿐 아니라, 기술의 혁신이 없던 시절부터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무시무시한 존재로 자리매김해온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AI라는 괴물을 대하는 자세
인간들은 AI를 향한 두려움을 다양하게 표출해 왔다. 그 가운데 효과가 유효했던 사례는 바로 대중 문화 콘텐츠를 통해 AI를 괴물처럼 매만지는 작업들이다. 특히 영화에서 우리는 AI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의 ‘HAL9000’, ‘터미네이터’(1984)의 스카이넷,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의 울트론을 떠올려 보라. 재밌게도 이런 사례들을 기술 발전을 이룩한 사회라든가 디스토피아나 근미래의 어두운 세상을 다룬 영화에서만 찾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 첩보 영화도 마찬가지다. 2023년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7편(부제: 데드 레코닝)과 올해 찾아온 8편(부제: 파이널 레코닝)의 메인 빌런도 사람이 아닌 AI ‘엔티티’였고, ‘스파이 코드명 포춘’(2023)에서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도 그렇다. 이 중 우리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AI를 다루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AI를 괴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에 대응하는 태도 설정에 있어 어떻게 좌표를 고정하고 어떤 몸부림을 쳐야 하는지 나침반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AI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사실 다른 창작물에서 묘사됐던 AI와 이 영화 속 AI ‘엔티티’는 사뭇 다르게 그려진다. 엔티티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스카이넷처럼 인류의 말살을 통해 기계가 중심이 되는 새 미래의 건설을 도모하지 않는다. 그보다 강조되는 건, 엔티티가 인간을 통해 학습하고, 더 인간처럼 생각하고 더욱더 인간과 흡사한 면모를 보이고 싶어한다는 점. 그를 통해 인간을 기만하고 능가하겠다는 야망을 드러낸다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엔티티는 핵 탄두 발사를 통해 인류를 절멸시켜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우면서도, 그 저변에는 지극히도 인간적인 사고방식과 인간적인 습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띠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엔티티를 파괴하려고 드는 에단 헌트(톰 크루즈)는 “엔티티는 인간을 바탕으로 학습하고 사고하는 만큼, 우리가 엔티티처럼 생각하지 않으려면 인간이 고려하지 않을 법한 행동과 생각을 보여줘야 한다”고 반복하고 있지 않나.
결국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7편과 8편이 엔티티를 다루는 방식은 어떠한가. 영화는 지금까지 에단 헌트의 선택과 행보가 정해진 운명 따위가 아닌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바로 과거의 주요한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수용하면서다. 지난 3편에서 맥거핀으로 소비됐던 ‘토끼발’이 미완의 떡밥으로 남지 않고, 엔티티로 다시 등장해 활용된 것 역시 모든 궤적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함이었을 테다.

액션이 아닌 믿음으로
즉 헌트의 경로와 선택이 늘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모든 일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고 또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던 것. 중요한 순간에 에단 헌트는 뭐라고 말하는가. 상대가 ‘설마 이런 짓을 벌이겠어?’, 싶은 순간에 그 설마를 현실로 만들어 버린다. 5편 ‘로그네이션’ 후반부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USB에 담긴 계좌 정보를 넘기라고 압박하는 솔로몬 레인을 마주한 에단 헌트가 어떻게 역으로 으름장을 놓았는가. 헌트는 계좌를 비롯한 비밀번호 등의 수많은 데이터를 전부 암기했다고 말하며, 나 없인 네가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을 거라 압박하지 않았나. 헌트의 언행은 레인의 예상범위를 한참 넘어서 버렸다. 그야말로 예측불허, 좌충우돌이다. 이뿐 아니라 언제나 헌트는 다음 계획이 뭐냐고 묻는 팀원들에게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지 않나. 예정된 패턴과 정해진 경로 없이 그저 일단 뭐라도 하면서 다음 계획을 만들어 가는 게 바로 헌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전략이자, 그만의 삶을 꾸려가는 방식이다. 헌트가 실시간으로 학습과 발전을 거듭하는 AI에게조차도 이 같은 전략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무조건 AI라고 해서 무결점의 완벽일 수는 없으니, 까딱해서 인간에게 속아 넘어갈 순간이 언젠간 찾아 온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이런 과정에서 헌트의 언행을 뒷받침해주는 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믿음’이다. 이 믿음은 나를 믿는 것부터 출발해, 내가 처한 상황과 주변 동료를 믿고 또 내가 결심한 순간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궤적을 모두 믿을 때 가치가 발현된다. 이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절대 에단 헌트에게 부여된 설정과 서사를 단순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취급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 다시 말해 헌트가 달려가도 총알 하나 맞지 않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든 경비행기에 매달리든 죽지 않는 이유는, 그가 무적이고 불사여서가 절대 아니라는 말이다.
1편에서 헌트가 기밀 정보를 확보하고 신변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일을 벌였는가. 데이터 취급소에 환기구를 통해 잠입하고, 고속 철도에 매달렸던 1편의 크고 작은 소동들은 분명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후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톰 크루즈는 높아져 가는 관객들의 기대치, 스스로의 만족도 달성과 결부된 높아진 기준점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즉 각본과 액션 디자인을 설계하는 단계에서부터 세심하게 공들여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 앞서 말했듯 여기서 혹자는 발전을 거듭하는 시리즈의 다소 무리한 설정에 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실제로 톰 크루즈의 기막힌 스턴트 액션을 대하는 시선은 두 가지다. 누군가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장인정신의 액션에 경의를 표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과도한 맨몸 액션을 전시하기 급급해 서사를 녹여내지 못하고 기교에만 치중한 유희로 변질됐다며 우려한다.
나는 후자의 의견에 반대한다. 더 나아가 그 주장이 성립되기 어렵다고 본다. 그 이유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관통하는 핵심이 역설적으로 톰 크루즈의 액션 그 자체에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사실 그보다는 톰 크루즈(에단 헌트)가 왜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논의가 더 이어져야 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니까 이건 나를 믿고 동료를 믿지 않으면 결코 벌어지거나 펼쳐질 수 없는 상황들이 아닌가. 동료를 믿으니까 단신으로 잠수하고, 이 선택지 외엔 어떠한 방도가 없으니까 꾹 참고 비행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톰 크루즈의 액션은 그저 서커스단마냥 곡예나 하자고 설계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 몸짓은 많은 이들의 믿음으로 구축된 생존의 몸부림이다.
이제 오우삼의 2편에서 헌트가 생물 바이러스 키메라 탈취를 위해 건물에 진입 계획을 세우는 장면을 되짚어 보자. 이 구간은 거대한 프랜차이즈가 되어 버린 이 시리즈가 초창기부터 자기반영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작전 브리핑을 하는 헌트의 모습과 교차되는 컷으로 등장하는 빌런 숀 앰브로스는 헌트의 계획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 그가 내뱉는 “아니, 헌트는 보안이 약한 공중에서 잠입해 올거야. 경비를 피하기 위해 병적으로 공중 곡예에 집착하니까”라는 대사는 1편의 공중 스턴트를 즉각 떠올리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이후 반복될 헌트의 위험천만한 맨몸 액션을 환기하는 역할도 한다. 2편이 나올 당시에만 하더라도 이 시리즈의 확장을 염두에 둔 건 아니겠지만, 8편의 피날레를 장식한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앰브로스의 비아냥은 어떤 의미로 작용하게 됐는지 따져보는 작업이 필요한 셈이다. 그러니 필요한 질문. 그가 공중 곡예, 아니 몸을 내던지는 위기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과시가 목적이 아니다. 그 상황에서는 그 방법이 가장 노출을 최소화하고, 또 작전 수행의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경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헌트의 입장에서, “미션 완료”를 외치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선택에 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4편은 시리즈의 큰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고스트 프로토콜’의 표면에는 핵탄두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이 자리하지만, 속살을 벗겨낼수록 불확실한 개인의 믿음을 시험하는 순간들이 곳곳에 서려 있다. 크렘린 궁에서의 초반부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에단 헌트의 팀이 이용하던 주파수에 끼어들어 솜씨 좋게 분탕질을 선사하는 코발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인물들은 믿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사실 첩보물에서 ‘믿음’은 그것이 부정될 때 가치가 급등한다. 믿지 않고 의심의 씨앗을 심어놓아야만 사건이 추가되고, 서사가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4편에서 ‘믿음’은 오히려 ‘믿음’으로만 존재해야만 한다. 헌트가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에 매달릴 수 있던 이유도, 브랜트가 자력만 믿고 몸을 던질 수 있던 이유도, 헌트가 그의 팀과 코발트의 계획을 막을 수 있던 이유도, 무엇을 믿느냐보다 믿음 그 자체 그러니까 믿어야 하는 상황을 수용하고 긍정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부르즈 칼리파의 유리벽을 기어 올라가는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의 몸에는 수많은 지지용 케이블이 달려 있었고, 실제 촬영은 (여전히 위험하지만) 비교적 안전한 상황에서 진행됐다. 그렇다면 본편에서 케이블이 지워졌을 때, 영화는 과연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걸까? 결국 4편에서 에단 헌트가 건물을 올라가는 그 신은 난감한 질문을 만들어낸다. 톰 크루즈가 실제로 위험한 스턴트를 소화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촬영 비화를 알기 전까지 관객은 이게 CG 인지 실제 스턴트인지 분간할 수 없다)과, 에단 헌트가 고층 빌딩을 올라 미션을 완수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각각 어떤 점에서 다른 걸까? 어느 쪽이든, '카메라에 찍힌 남자의 위험천만한 행위 자체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이 똑같다. 그래서 4편의 동력은 진실과 거짓의 가치 판단을 섬세하게 설정하는 데 있지 않다. 불확실하든 확실하든, 무언가를 믿기로 하는 것. 바로 이런 태도가 3편에서 4편로 넘어오면서 시리즈의 변곡점이자 분기점이 되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믿음 그 자체로 인해 인과가 형성된다는 점이 본편의 기이한 매력이 아닐지. 그러니 믿지 않으면, 에단 헌트는 미션 완료를 외칠 수 없지 않나.

이어지는 5편은 어떠했나. 믿음(혹은 믿는 행위)의 작동 여부보다는, 믿음이라는 관념 자체가 어떤 조건에서 성사되는지 따져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가능성 혹은 확률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해야 한다면, 아니 그것만이 나와 세계를 지탱하는 논리이자 형식이라면, (앞서 언급한) 5편 후반부에서 헌트가 보여주는 말도 안 되는 능력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헌트가 선사하는 그 광경을 두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 장면에서 관객은 과연 에단 헌트라는 캐릭터의 설정을 기반으로 세계의 논리와 정보를 수용할 수 있을까? 혹시 지금껏 프랜차이즈화를 이룩한 톰 크루즈라는 배우의 특정 면모가 선행해서 가치 판단에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은 걸까? 그 장면이 과연 헌트라는 존재를 입증시키는 혹은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 에단 헌트는 또다시 아니 늘 그랬듯이 새로운 위협에 직면한다. 와해된 조직이 재생되는 건 이제는 불가능해 보인다.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대상은 세계인가 나 자신인가? 만약 그것을 분간할 수 없다 해도 5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가를 관객에게 관철시키려고 들지 않았나. 서사의 하위 개념과 맞닿아 있는 개연성, 핍진성 따위의 것이 아니다. 어쩌면 관념적인 요소들, 다시 말해 톰 크루즈와 에단 헌트를 오가는 어떤 존재성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 존재성을 연결하는 데 기여하는 게 바로 ‘믿음’이라는 키워드다. 시리즈가 지속되는 동안, 에단 헌트이자 톰 크루즈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왔던 어떤 궤적이 있을 텐데, 본편 역시 그것에 대한 일종의 점검 과정이라도 보아도 좋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 극한 환경에서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는 왜 이렇게까지 목숨을 내던질 만큼 열정으로 모든 일에 임하는가?
이제 우리는 7편과 8편에 이르러, 이렇게 쌓아온 믿음에 의지하는 헌트의 면모가 가장 확실히 발산될 뿐 아니라 동시에 절박하다는 점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헌트와 그의 팀원들이 엔티티에 세상이 잠식되는 걸 막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선보였는지 떠올려 보면 금방 납득이 갈 테다. 정말 놀랍게도 헌트는 AI의 수싸움에 당하지 않기 위해 디지털 통신과 교류를 원천 차단하는 방법을 고안해 낸다. 그 방법이 황당할 만큼 터무니 없다는 점이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그가 팀원들과 동선을 쪼개 일부러 분리되려고 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AI에게 잠식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그 대상과 다른 경로를 걸을지 고민 끝에 펼쳐낸 생각들이긴 할 테다. 그렇지만 헌트의 계획은 말로만 들었을 때 너무나 허무맹랑하다. 나만 완벽하게 단계별 과제를 수행해선 안 되고, 상대 역시 그에 맞춰 완벽한 타이밍에 요구치를 달성해야 하지 않나.
각본으로만 보면 분명 허술하기 짝이 없고, 우연에 기댄 게으른 전개라고 욕을 먹을 게 뻔하다. 실관람객들의 반응에서도 역시 그런 평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8편에 관한 혹평은 대개 이런 지점들에서 비롯됐다. 그럼에도 헌트는 그 무엇도 없이 단신으로 대통령을 설득하러 간 뒤, 항공모함을 빌려 세바스토폴호가 잠든 다이빙 포인트를 찾아내야 한다. 그 좌표는 저 멀리 떨어진 팀원들이 재래식 모스 부호로 송신해줘야 하며, 동료들이 제시간에 맞춰 모스 부호를 보낼 때 헌트의 잠수함 역시 그 신호를 정확히 캐치해야만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줄 수 있다. 무모한 계획을 실행하기 전, 헌트는 담담하게 팀원들 각자가 해야 할 일만 일러준 뒤 홀연히 떠난다. 서로가 서로의 계획이 성공하길 바라면서,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고 타이밍을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니까 두 진영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잘못되면 세상은 엔티티에게 넘어가고 인류는 멸망하는 철제절명의 순간이지만, 헌트는 그저 믿음에 기대 세상을 그 가능성에 거는 도박에 몸을 맡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헌트에게 이건 도박이 전혀 아니다. 그보다는 절박한 생존의 아우성이다. 반복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기 때문에 이런 경로를 택하게 된 것뿐이다. 그러니 관객 입장에서 각본의 전개가 과도한 우연의 일치가 엮이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이런 서사 구조가 단순히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헌트의 믿음이 만들어내는 산물이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데 대한 방증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액션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니라, 그 액션이 배치된 경위를 따져봐야 한다는 말과 같다는 것.

에단 헌트에서 톰 크루즈로, 스크린에서 현실로
8편에서 엔티티가 헌트에게 보여주는 미래의 이미지들을 떠올려 보자.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을 경우 인류에게 닥쳐올 예정된 미래상이 빠르게 컷되면서 헌트를 압도하고 있다. 엔티티는 헌트가 실행에 옮길 법한 계획이 담긴 미래의 장면을 보란 듯이 보여주면서 헌트를 불안에 빠뜨린다. 우리는 6편 ‘폴아웃’에서 당도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둘러싸인 헌트의 모습을 이미 목격한 적이 있었다. 에단 헌트에게 찾아오는 혹은 그가 직면하는 환상, 꿈 등 비현실의 영역과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폴아웃’은 에단 헌트의 꿈으로 포문을 연다. 이때 줄리아를 바라보는 에단 헌트의 모습은, 지난 3편과 4편에 이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톰 크루즈와 미셸 모나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류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따라서 에단 헌트와 톰 크루즈의 존재가 어떤 순간에 더 유효한지를 따지기 시작할 때 ‘폴아웃’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이 환상을 벗어난 뒤 미션 지령을 받는 에단 헌트의 모습은 시리즈의 클리셰로 반복됐던 그 모습, 우리가 보아 왔던 톰 크루즈의 그 모습과 겹쳐지면서 관객들에게 하나의 통과 의례처럼 작동하는 셈이다. 이쯤 되면 ‘이번엔 IMF가 어떻게 신원을 확인한 뒤 과연 어떤 방식으로 메시지가 폭파될까?’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이건 결국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에단 헌트의 영화로만 존립할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톰 크루즈가 관객들에게 각인시켜 온 면모가 관객 각자의 인식 체계 어딘가에 잔존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특히 ‘폴아웃’에는 특이한 구간이 있다. 발생 가능한 하나의 미래 가운데 경우의 수를 콕 집어 플래시 포워드처럼 펼쳐 놓는 점에서다. 에단 헌트가 지닌 살생에 관한 가치관에 대해 관객들이 엿볼 기회를 얻는 셈이다. 실제로 영화가 진행되고 나면 관객들 중 일부는 아까 봤던 시퀀스가 분명히 예정된 미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헌트의 허무맹랑한 상상이라기엔 또 구체적인 개연성을 갖춘 듯 보인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됐든 관객이 그 장면을 시간의 흐름 속 사건 간 인과 관계의 맥락으로 읽어내는 대신, 인물의 내면 혹은 가치관에 맞닿은 지점으로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 인물의 서사에 집중하게 될 때, 가장 중요한 건 존재성을 따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에단 헌트가 영화 속 온전한 헌트로 존립할 수 있는지, 혹은 톰 크루즈가 영화 바깥의 배우로서만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지 말이다. 다시 말해 시리즈를 거쳐온 에단 헌트의 서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관객들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관한 쟁점이 생겨난다는 것.
이를 염두에 둔 채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파이널 레코닝’의 도입부를 떠올려 본다. 극장에서 본편이 시작되기 전, 톰 크루즈가 홀로 찍은 인사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영화를 잘 감상해달라며 당부와 인사를 건넸지 않았나. 주연이자 제작을 맡은 톰 크루즈의 의지가 극 중 에단 헌트를 비롯해 영화 곳곳에, 그리고 영화 전체에 배어 있는 셈이다. 톰 크루즈는 8편을 통해 비장한 각오를 곳곳에 내비친다. 그러니 스크린에는 에단 헌트의 육체만 들어차는 게 아니라, 기계와 첨단 기술로 대변되는 AI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간 톰 크루즈의 고집 역시 서려 있다. AI라는 괴물을 대하는 데 있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그 괴물에 집중하는 대신 괴물을 대하는 인간이 어떤 마음일지 들여다 보고 있다.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는 괴물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실체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괴물은 디지털 정보 속에, 우리의 의식 속에 얼마든지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에단 헌트 아니 톰 크루즈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작 중 그레이스는 헌트의 무리한 계획을 향해 80억 인구를 두고 도박해서 되겠냐는 우려를 표한다. 이때 영화는 여기서 헌트에게 면죄부를 쥐어주거나, 그를 두둔하진 않는다. 다만 할 수 있는 건, 헌트가 동료와 나의 선택을 믿듯이 영화도 헌트를 믿을 뿐이다.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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