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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면의 불안마저 껴안으며, 자기 위로의 강박을 깨나가는 웨스 앤더슨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내면의 불안마저 껴안으며, 자기 위로의 강박을 깨나가는 웨스 앤더슨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5.06.1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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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의 작품에 대한 감상은 특유의 우아한 미장센에 현혹되어 형식적인 측면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강박적인 대칭미와 반짝이는 인서트 컷은 관객의 눈을 사로잡지만, 이야기에 짙게 배어있는 잔혹함은 다각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아기자기한 캐릭터와 실소를 유발하는 블랙코미디는 그 ‘잔혹동화적’ 측면을 오래도록 감추어 왔다.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극단적인 열등감에 시달린다.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수십 마리의 동물이 처참한 최후를 맞았고, 기한이 만료된 사랑은 다가올 이별을 예고한다. 그러나 이 모든 비극에도 등장인물들은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강아지들이 분쇄기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전자오락의 한 장면처럼 묘사한 <개들의 섬>(2018)은 죽음이 일종의 유희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외상적 사건들을 접하며 죽음이 내면화된 것일까?

웨스 앤더슨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동화적인’ 색채에 주목하면, 참혹한 과거에 매몰되기를 거부하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떠올릴 수 있다. 아이를 닮은 예술가는 영화 바깥에서 자신의 삶을 서사화하며 모든 상황을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몰아붙인다. 그렇다면 집착에 가까울 만큼 해피엔딩을 고수하는 앤더슨의 영화는 일종의 ‘포르트-다(fort-da)’ 놀이로 바라볼 수 있다. 아이는 어머니가 떠나가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며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난다. 마찬가지로 영화감독은 삶이 남긴 상흔을 승화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감정을 절제하는 캐릭터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거리를 벌리기 위한 장치로 작용한다.

이번 신작 <페니키안 스킴>(2025)은 언뜻 앤더슨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불우한 부녀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죽음으로 가득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들이 함께 고난을 겪으며 관계를 회복해나가는 결말은 <로얄 테넌바움>(2001)과 <다즐링 주식회사>(2007)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하지만 인물의 감정선에 조금 더 세밀하게 다가가 보면, <페니키안 스킴>은 여태껏 앤더슨의 영화에서 발견하지 못한 불안 증세로 가득하다. 자자(베니시오 델 토로)는 목숨을 위협받는 위기 상황에 연신 “불안하지 않다”고 말한다. 비행기가 피격됐을 때도, 시한폭탄이 눈앞에서 째깍거려도,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그는 침착한 태도로 일관한다.

 

그는 정말 불안하지 않은 것일까? 이에 비해 영화의 모든 연출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안 증세를 가리킨다. 자자의 비서가 비행기 폭발로 상반신이 날아가는 오프닝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보육 교사(마이클 세라)가 죽음을 맞은 비서의 자리에 앉으며 금방이라도 죽음이 반복될 것만 같은 기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이로써 관객은 기체에서 수상한 소리가 날 때마다 오프닝 시퀀스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앤더슨의 작품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점프컷, 격동적인 클로즈업 트래킹과 시점샷이 영화 전반에 드리운 이 불안한 감정을 반영한다. 자자는 늪지대에 빠져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나를 도와주지 말라”며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한 그의 말을 반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불안하지 않다(몹시 불안하다).”

<페니키안 스킴>은 주요 갈림길마다 배치된 사건의 결과를 과감히 생략한다. 비행기가 추락할 때 살기 위해 버둥대는 자자의 모습도, 일생일대의 계약이 걸린 자유투 내기의 마지막 슛도 없다. 사건을 매듭짓지 않아 개운함은 온데간데없고 끝없는 사건의 연속뿐이다. 각 에피소드가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갖춘 것도 아니다. 언제든 주인공 일행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 깨진 조각으로 가득한 영화의 구조는 숱한 암살 시도로부터 살아 돌아온 자자의 삶을 닮아있다. 죽음 이후의 죽음 이후의 죽음 이후의 …. 악명 높은 사업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지만, 사후 세계를 제집 드나들 듯 오가는 그의 인생은 텅 빈 무덤만큼이나 공허하다.

 

자자가 삶에 회의를 느낄 무렵, 수녀가 된 딸 리즐(미아 트리플턴)이 그 앞에 등장한다. 딸은 사업을 위해 착취와 기근을 종용하는 아버지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보인다. 자자는 자신이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말하며 죄를 부정하지만, 세 명의 전처와 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환상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부정에 대한 죄의식을 엿볼 수 있다.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는다는 보편적인 믿음은 현실에서 그의 숨통을 노리는 적들보다 근원적인 형태의 불안을 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절대자에게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다르다. 죽음 이전에 죽음을 미리 경험케 만드는 무신론자의 불안(하이데거)은 삶 전체를 되돌아보고, 마침내 그를 결단으로 이끈다.

사촌 힐다(스칼렌 요한슨)에 따르면, 세상 모든 갈등의 본질은 단순히 “누가 이기고 질지 궁금해하는” 유치한 자존심 싸움에 있다. 반복되는 종교적 모티브는 계속되는 위협에 몸과 마음이 지친 자자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그의 말대로 불안의 최종장 누바(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성경에나 나올법한(biblical) 인물이라면, 형제간의 혈투는 카인과 아벨의 에피소드를 연상시킨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후대에 원죄로 이어지듯, 자자와 누바는 아버지 세대의 증오를 대물림한다. 자기반성을 통해 이 모든 대립의 무상함을 깨달은 자자는 갈등을 대화로 풀고자 하지만, 세계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잠깐만, 우리 미친 개 마냥 서로를 물어뜯기 전에 문제의 실체부터 확인해보자. 어쩌면 애초에 싸울 가치가 없을지도 몰라.” - 개들의 섬 中 -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난 뒤, 아버지와 딸은 비로소 일상다운 일상을 맞이한다. 평화로운 카드놀이는 마치 주인공을 둘러싼 모든 불안이 해소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는 금세 카메라를 돌려 물이 새는 천장을 비추며 막을 내린다. 짧다면 짧은 이 마지막 카메라 무빙에 담긴 웨스 앤더슨의 변화에 주목해보자. 내리꽂는 물방울은 과거 엄격한 질서가 도사리는 자자의 궁전에서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이는 앤더슨이 평소 즐겨 사용하던 낭만적인 봉합과 다르다. 물이 새는 천장은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주인공이 계속해서 마주할 불안을 내포한다. 하지만 걱정은 없다. 불안을 삶의 한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삶을 되돌아볼 줄 아는 인간은 내면의 불안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원동력으로 삼는다.

 

사진 출처 :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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