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인 교리만큼이나 교조주의적인 세계 권력의 영향 아래, 모든 형태의 다양성과 특성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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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운명은 존재 하는가? 우리 것이 아닌 모든 문화는 어떻게 보면 무관심한 상호교류의 운명에서 비껴나 있었다. 보편화와 세계화로 이어지는 통로에 비판의 문턱은 어디 있는가? 세상을 이데아의 추상화 쪽으로 몰아붙이는 현기증은 무엇이고, 무조건 이데아의 현실화 쪽으로 몰아붙이는 현기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원래 보편성은 하나의 이데아였다. 그런데 이데아가 세계화 속에서 현실화 되면서 이데아는 이데아로서 자멸하고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인간이 그 본보기다. 인간은 죽은 신의 빈자리를 차지한 뒤, 세상을 홀로 지배하게 됐지만, 최종적 이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적이 없어진 인간은 적을 내부에서 키우며, 비인간적인 종양 덩어리를 분출해낸다.
바로 여기로부터 세계화의 폭력성이 생성된다. 즉 모든 형태의 거부, 나아가 최후의 죽음 같은 모든 형태의 기이함까지도 몰아내는 시스템의 폭력성과, 사실상 알력과 죽음이 금지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폭력성과,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 폭력성 자체를 종식시키고 모든 자연적인 질서, 몸, 성별, 탄생 혹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동되는 폭력성 등이 그것이다.
폭력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유해성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그 폭력성은 바이러스성이기 때문이다. 폭력성은 전염되고 쇠사슬처럼 엮어져 반응하며, 서서히 우리의 모든 면역력과 저항능력을 파괴한다.
그렇지만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세계화는 아직 치러야 할 경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동질화 되고 용해되는 그 세계화의 힘에 맞서, 도처에서 그 힘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힘들이 봉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더 거세지는 세계화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저항 이면에서,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거부, 그 이상의 기운을 감지해야 한다. 세계적인 테크노 구조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를 등가로 치는 정신구조에 대한 거부, 즉 획득한 현대성과 '진보'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일종의 수정주의를 인지해야 한다. 명철한 우리 사고로 보면, 수정주의의 재출현은 난폭하고,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인 면모를 띨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종적, 종교적, 언어적 집단 형식뿐만 아니라 개별적, 성격적, 신경적 집단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도약들이 선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이며, 심지어 폭력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일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오늘날 서양의 가치들과 반목하는 이슬람을 포함한, 추상적인 보편화에 반대되는 세력의 이슈가 되고 있다.
누가 세계화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규제 완화에 제동을 거는 것이 목적인 반세계화 운동으로는 시스템을 작동 불능으로 만들 수가 없다. 요컨대 반세계화 운동은 정치적으로는 막대한 충격은 주겠지만 그것이 미치는 상징적인 충격은 아예 없는 편이다. 또, 세계화의 폭력성은 내부적인 우여곡절을 지니고 있지만 자체 시스템이 게임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 그것을 극복해 낼 수가 있다. 시스템을 작동 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긍정적인 양자택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로부터 나온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특이성들. 그 특이성들은 양자택일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규칙을 따른다. 가치 판단이나 현실 정치의 원칙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 특이성들은 최상 혹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특이성들을 전반적인 역사적 행동 속에 연계 시킬수도 없다. 그 특이성들은 유아독존적이고 지배적인 모든 사고를 뭉개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유일무이한 대안은 아니다. 그것들은 자신들의 게임과 게임의 법칙을 만들어 낸다.
특이성들이 꼭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언어, 예술, 몸 혹은 문화에서처럼 특이성은 미묘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폭력적이기도 하다. 테러리즘이 그 중 하나다. 테러리즘은 모든 문명을 상대로 보복을 한다. 유일무이한 세계 권력을 정착시키기 위해 모든 문명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인 충격'이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문화에 대한 무관심과 대부분의 분야에서 모든 것들이 간직하고 있는 더 이상 축소될 수 없는 이타성(利他性) 간에 돌출되는 소위 인류학적인 대립이 문제이다.
종교적인 교리만큼이나 교조주의적인 세계 권력은 모든 형태의 다양성과 개성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교조주의적 논리 아래, 모든 다양성과 개성들은 좋든 싫든 간에 세계의 질서를 따르든지,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서구의 임무(옛 서구라고 지칭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왜냐면 서구 고유의 가치가 퇴색 된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수많은 문화들을 야만적인 등가원칙을 내세워 굴복시키는데 있다.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 문화는 다른 문화들을 상대로 보복에 나설 수밖에 없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롯한 모든 전쟁들도 처음에는 정치적 경제적 전략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상황을 정상화 시키고, 전 국토를 정비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같은 목표는 저항지역을 축소시켜 식민지화하고, 지리학적이건 보편적인 정신이건 간에 모든 분야에서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전 분야를 길들이려는 속셈이다.
서구 증오 '박탈감 아닌 굴욕감' 탓
세계화 시스템은 사나운 질투심에 의해 가동된다. 고급 주류 문화들에 대한 비주류 문화와 저급문화의 질투심, 높은 수준의 문화들에 대한 저급한 시스템들의 질투심, 희생정신의 문화나 형태들에 대한 비(非)신성화된 사회의 질투심이 그 것이다. 이 같은 시스템에 있어, 저항하는 모든 형태는 사실상 테러리스트이다.1)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영토에서 음악, 텔레비전, 혹은 여성들의 얼굴에 이르기까지 '민주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모든 허가와 자유가 금지될 수도 있다. 어떤 국가가 이미 언급한 종교적인 원칙, 이를테면 '자유'국가들로서는 견딜 수 없는, 우리가 속칭 문화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완전히 발목이 잡힐 수도 있다. 현대성이 보편적인 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성을 우리의 보편적인 도덕성과 가치에 의구심을 품게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선(善)이나 종(種)의 자연적인 이데아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즉각 현대성을 광신적인 특성을 지녔다고 봤다. 그러나 그것은 독특한 사유나 교감을 우선하는 서구에서 볼 때는 범죄이다.
여타 국가들이 서구에 대해 품는 증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전망을 뒤집어 봐야 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강탈당하고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의 증오심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받고 아무것도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의 증오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탈이나 착취에 대한 증오심이 아니라, 굴욕감에 대한 증오심이다. 9.11테러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한 응징이다. 굴욕감을 굴욕감으로 응징한 것이다.
세계 권력의 최악의 시나리오는 공격받거나 혹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굴욕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9.11테러로 굴욕을 당했다. 테러리스트들이 세계 권력에게 9.11테러를 통해 되갚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반격은 육체적인 보복을 가하는 기기들이다. 그래서 반격은 상징적으로 종식됐다. 전쟁은 공격에 대한 반격이지 도전에 대한 반격은 아니다. 도전장은 받은 굴욕감을 되갚고 싶을 때만 던진다(하지만 폭탄으로 짓뭉개거나 관타나모 감옥에 개처럼 수감하지는 않는다).
"세계화는 고급주류 문화·희생정신 문화에 대한 질투"
"테러리즘은 절망적인 가상 현실에 대한 분노감 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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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세계화 수혜자에 대한 절망감
모든 지배는 보답의 부재 위에 그 초석을 다진다. 그것이 지금까지 기본적인 법칙으로 자리잡아 왔다. 한쪽의 일방적인 기부는 권력행사이다. 선(善)의 제국, 선의 폭력성은 바로 보답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즉, 신을 대신하는 것이다. 혹은 노동(하지만 노동은 상징적인 보상이 못된다. 결국 폭동이나 죽음이 유일한 대응책이다)을 빌미로 노예의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는 주인을 대신하는 것이다. 또한 신은 희생의 여지를 남겼다. 전통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언제라도 신, 자연, 혹은 그 어떤 초자아에게라도 희생을 통해 보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것이 인간과 사물 간에 상징적인 균형을 유지시킨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부채가 없다. 상징적인 부채를 갚아야할 대상이 사라졌다. 그것이 바로 우리 문화의 저주이다. 부채가 없어져 기부가 불가능해져서가 아니라, 보답이 불가능해졌고, 모든 희생의 길은 뇌관이 뽑힌 채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눈에 띄는 모든 희생의 형식 속에는 희생의 패러디만 남아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움을 줄곧 받아야 하는 무자비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신이나 자연으로부터가 아니라, 일반화된 기술적인 상호교환 장치나 혹은 일반적인 은총을 통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얼핏 보면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받아 챙겼고, 좋든 싫든 모든 것을 차지할 권리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을 연장 받은 노예, 청산하지 못한 빚 때문에 묶여 있는 노예 꼴로 전락했다. 이 모든 상황은 상호교역을 체결하고 경제 질서를 존중하기로 한 이상 오래 지속될 공산이 있다. 하지만 일순 근본적인 룰이 이런 상황을 와해시킨다. 긍정적인 거래에는 필수적으로 부정적인 보답거래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예생활, 보호받던 존재, 침윤당한 존재로부터 벗어나며 격렬한 해방감을 보이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원대복귀는 노골적인 폭력(일부 테러리즘이 그것이다.)이나 무기력한 부정의 형식, 즉 우리의 현대성의 특징인 자신에 대한 증오심과 회환을 표출하는 것이다. 모든 부정적인 열정들은 보답이 불가능한 타락한 형식이다.
우리의 몸 내부에서 우리가 혐오하는 것은 우리가 막연한 대상에게 품는 원한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문학 속에서 배심원들은 노예근성이 있는 대중들에게 바로 그러한 과도한 현실성, 과도한 권력과 안락함, 보편적인 가변성, 명확한 성과에 집착하는 운명을 점지해 준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은 우리 문화 안에서 바로 그런 것들을 느낀다. 그래서 테러리즘이 반향을 일으키고, 테러리즘이 휘두르는 마술에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다.
굴욕당한 사람들과 모욕당한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처럼, 테러리즘은 세계화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테러리즘 또한 총체적인 테크놀로지, 절망적인 가상(virtuelle)의 현실 그리고 '세계화되어" 퇴락한 모든 종(種)과 인류의 윤곽을 그려낼 네트워크와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근간을 두고 있다.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장 보드리야르는 누구인가 지난해 작고한 장 보드리야아르(1929-2007)는 프랑스의 저명 철학자이자 사회 이론가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자본주의와 세계화 등 현대성을 재해석한 석학으로 손꼽힌다. |
* 저서로 <소비의 사회>(1970),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1981), <테러리즘 정신>(2002), <지옥의 힘>(2002) 등이 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격월간지<마니에르 드브와>(2004년6-7월호)에 게재된 것임.
1) 한발 더 나아가 모든 자연재해조차도 테러리즘의 일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체르노빌사건처럼 대부분의 기술적인 사고는 테러리스트의 면모와 자연재해의 면모를 동시에 지녔다. 인도 보팔에서 생긴 맹독성 가스유출 사건도 기술적인 사건이지만 테러리스트 적이다. 모든 항공기 폭발사건은 테러리스트 단체들이 저지를 수 있다. 비이성적인 사건의 특징은 그 어떤 것에도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상상이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냉기나 혹은 지진조차도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게 새로울 것도 아니다. 1923년 도쿄지진 당시, 수천만의 한국인들이 혼란을 유발시킨 장본인들로 몰려 몰살당했다. 우리처럼 통합된 시스템 안에서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 모든 것은 결점이 없어 보이는 시스템의 취약한 틈새를 찾아 나선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미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그 시스템에 지배당하며, 그 자체에 결함이 없는 것이 가장 심각한 재난이 아닐까 하고 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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