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서민’은 나타나지 않는다
‘서민’은 나타나지 않는다
  • 이택광/경희대 교수·영문학
  • 승인 2010.10.08 17: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rée]

   
▲ <채식주의 흡혈귀들>, 1962-레메디오스 바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아테네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실제로 ‘최선의 사람’이 인민의 동의를 얻어서 귀족정치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얼핏 생각하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뜻밖의 이야기를 숨겨놓은 것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말을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를 지적하는 의미로 해석한다. 원래 패러독스는 모순적 명제의 공존을 뜻하는데, 플라톤의 언급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에 내재한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정치적 주체를 봉건적 위계에 편입

민주주의의 패러독스에 대한 랑시에르의 주장은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는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잣대를 제공한다. 특히 이 상황은 국가와 계약을 맺은 정치적 주체로서 존립할 수 있는 ‘인민’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서민’이라는 전근대적 개념으로 치환하는 과정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정당한 정치적 주체인 ‘인민’이라는 개념이 봉건적 위계를 연상시키는 ‘서민’이라는 용어로 탈바꿈해서 ‘호명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원래 서민이라는 말은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을 뜻했지만, 근대적 의미로 변용되면서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서민이라는 말의 쓰임에서 신분적 특권이 경제적 계급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데모스(Demos)의 정치체제(Polity)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민의 동의를 얻은 ‘최선의 사람’이 관리하는 국가체제다. 형식적으로 주권은 데모스에게 있다고 하지만, 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보이는 존재는 인민이라는 국가와 계약을 맺은 자들일 뿐이다. 이들은 언제나 국가에 ‘평등’을 요구한다. 플라톤도 밝히고 있듯이, 평등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기원을 가지고 태어난 동포(同胞)의 논리가 여기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간과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면 서로 다른 정치체제에 대한 요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갖는다는 것은 각자 다른 국가를 상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의 정치를 갈구했지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핏줄을 나눈 형제만의 체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역으로 새로운 형제를 만들어낸다. 민주주의를 통해 너도나도 형제가 되는 것이지, 형제끼리만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궁극적으로 노예도 평등한 존재임을 인준할 수밖에 없었듯이, 민주주의 이념은 기본적으로 왕후장상의 씨를 다르게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민주주의는 원리적으로 패러독스를 내재할 수밖에 없는 ‘혼란스러운 정치체제’로 비쳤던 것이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문제점은 대의제라는 구조에서 발생한다. 데모스의 요구를 구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정치체제는 실제로 데모스의 정치를 억압하고 배제함으로써 작동한다. 데모스의 체제 ‘데모크라시’는 데모스를 정치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말처럼, 민주정은 실제로 최선의 사람이 통치하는 귀족정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민주주의의 주체이기도 한 데모스는 ‘불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데모스는 자신의 불만을 근거로 정치체제가 정당하게 작동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다.

데모스를 억압하고 서민으로 대체

이런 까닭에 민주주의라는 ‘대리만족’의 구조는 데모스의 조건을 언제나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치를 억압하고 과잉을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정치인에게 데모스를 데모스로 호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흔하게 데모스를 대체하는 용어가 바로 서민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서민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신분적 특권보다도 경제적 계급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경제적 범주로 서민을 고정해놓음으로써 노릴 수 있는 효과는 바로 정치와 경제의 분리다. 경제를 정치적인 것과 관련이 없는 영역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세계는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낙원으로 전환된다. 왜냐하면 경제는 교환가치의 세계고, 이 세계는 데모스의 과잉을 배제한 완벽한 합리적 거래의 처소이기 때문이다.

경제 논리는 인민을 데모스의 과잉에서 구출해 치안 통제에 묶어놓는 역할을 한다. 치안의 내면화야말로 인민이 국가에 ‘방황하는 영혼’을 고정해놓는 과정이다. 따라서 서민이라는 용어는 궁극적으로 구조로 포섭되지 않는 인민의 무의식을 경제적인 것으로 치환해 국가라는 합리적 재현의 영역에 붙잡아두는 금지의 기표인 것이다.

얼마 전 이명박 정부는 딸 특채 문제로 구설에 오른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을 전격 해임함으로써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는데, 여기에 개입한 논리가 바로 ‘공정한 사회론’이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공정성은 형평성의 다른 말인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 보면 상당히 고대 그리스의 용법에 충실한 의미를 띠는 것이기도 하다. 원래 그리스에서 공정함(Justice)이라는 것은 ‘남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적절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다분히 능숙함과 최선을 미덕으로 여겼던 소피스트적인 평등주의가 여기에 구현됐다. 이런 공정한 사회론에 대한 반발이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기본적으로 소피스트적인 공정성은 기계적이고 계량적인 형평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경제주의를 통한 정치적 억압

공리주의를 정확하게 추구하는 것만큼 기득권층에게 무서운 일은 없다. 실제로 19세기에 등장한 다양한 정치사상이 목표로 삼은 것도 공정과 형평을 통한 조화로운 사회였다. 이를 위해 필요했던 것이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데모스의 과잉이었다. 서구 부르주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인민의 공백인 데모스가 출현해서 공동체의 합의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대혼란의 상황을 막기 위해 서구 부르주아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지속적으로 추구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대의 산물인 ‘민주화’ 과정을 통해 이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규정된 이 과정이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경제주의를 통한 정치 억압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인민으로 자신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서민이라는 경제적 외피를 뒤집어쓰고 정치적 주체라기보다도 ‘인간 동물’로서 쾌락 원칙에 충실한 삶을 선택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목도했듯이, 이 안락한 즐거움의 결과물이 바로 이명박 정부였던 셈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집권 중반기를 넘기면서 ‘공정한 사회’라는 기조를 들고 나온 것은 그렇게 새삼스럽다고 말하기 어렵다. 공정한 사회라는 기치만큼 서민이라는 ‘경제적 기표’에 인민을 포섭해둘 수 있는 좋은 핑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치안 확립은 궁극적으로 인민의 정치를 찾아내 경제 논리에 포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논리를 통해 인민의 과잉을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정치권력의 역할이고 국가의 기능이다.

때때로 국민으로 호명당하는 인민은 국가라는 상징계의 필연성에 종속돼 있지만, 국가를 구성하는 기표의 연쇄로 재현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는 이런 이유로 발생하는 것이다. 대의제를 통해 재현할 수 없는 욕망은 곧 민주주의에 해로운 데모스의 주이상스이다. 주이상스는 멈출 수 없는 ‘예외적 주체’의 욕망이고, 상징계의 규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다른’ 즐거움이다. 서민은 이렇게 공동체를 통해 합의된 욕망과 다르게 정향되는 주이상스에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주이상스라는 해괴한 욕망은 교환가치의 법칙을 넘어서 우리에게 ‘피곤’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주체가 만들어진다면 피곤을 이기는 지속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2008년 촛불은 서민 범주에 포섭할 수 없는 인민이 어떻게 데모스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현신하는지를 잘 보여주었지 않은가?

보수우파는 손쉽게 ‘밥만 먹여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인민은 밥만 먹고 살지 않는다. 보수우파의 주장처럼 인민이 밥에 만족하는 인간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면 북한 체제 같은 정치적 실패는 없었을 것이다. 밥을 넘어선 것이 부자라고 했을 때, 자본주의의 경제구조는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줄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자본주의가 발전해서 부의 총량은 늘어나더라도 부자의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서민이라는 전근대적 용어는 자본주의 현실을 소거시키기 위한 합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민경제를 챙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재래시장을 방문하는 것이야말로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상징적 행위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서민이라는 용어법이 얼마나 효과적인 포섭 전략인지를 증명한다.

데모스의 출현을 예비하는 서민

서구의 부르주아와 달리, 한국의 부르주아는 아직도 역사가 일천하다. 게다가 귀족계급이나 구체제와 투쟁하면서 정체성을 정립한 경험도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 서구의 부르주아와 다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서민 정서’라는 특이한 요소다. 서민 정서로 인해 ‘한국 자본주의의 노른자’라고 불리는 압구정동에 여전히 연탄불 돼지껍데기 집이 있는 것이고, 최첨단 아파트에 김치냉장고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도 서민적일수록 좋다는 이런 생각이야말로 참으로 한국적인 미덕의 범주라고 할 수 있겠다. 최선의 상태나 우월한 능력도 이런 미덕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서민이라는 개념은 한국 사회의 개인이 자본주의라는 ‘아버지의 법’을 체현하기 이전, 다시 말해 타락의 문턱을 넘기 전에 간직하고 있던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로 진입하면서, 또는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을 암시하는 기표가 바로 서민인 것이다. 그러므로 서민이라는 기표가 작동하는 지점이야말로 데모스가 은폐되고 포박된 곳이다. 그러나 서민이 딱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도리는 없다. 이명박 정부는 재래시장을 서민의 표상으로 지정하려 하지만, 서민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서민은 억압된 데모스의 모습으로 한국 민주주의에 내재한 패러독스를 무감하게 만들 뿐이다.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르면 국가권력은 ‘국민’의 것이기에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지만, 정작 한국 사회의 구성원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이 기회를 마치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무화시킨다. 그래서 자신이 선출한 권력자가 서민으로 자신을 재규정해주기를 바라는 퍼포먼스를 정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착각의 정치는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비정치적 퍼포먼스야말로 정치적 데모스의 출현을 언제나 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민은 결코 인민으로 충족되지 않는 어떤 과잉을 회피하기 위해 발명된 베일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모든 경제적 요구는 정치적 과잉을 통해 결국 다시 정향될 수밖에 없다.

글•이택광 
문화평론가. 저서로 <이현세론: 영웅 신화와 소외성의 조우>(1997),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2002),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2007),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2010) 등이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