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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만주인가
왜 다시 만주인가
  • 방현석 | 소설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4.03.2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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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항일무장투쟁사와 영화, 드라마, 소설의 복수 혈전
범도루트 지도(홍범도장군 이동 경로)

만주가 아니면 벌어질 수 없는 사건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암살>, <밀정>, <봉오동 전투>,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도적-칼의 소리>, <경성 크리처>, 뮤지컬 <영웅>은 모두 만주의 항일무장투쟁과 관련된 작품들이다. <하얼빈>과 <범도>도 만주에서 떼어내 읽을 수 없는 소설이다.

이미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멀어진 100년 전의 만주가 다시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 소설로 이어지면서 새삼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만주의 역사적 시간이 간직한 아이러니와 미스터리를 빼놓고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주에 남겨진 아이러니와 미스터리는 우리 역사가 외면한 피와 눈물로 아로새겨진 단단한 비극의 시간이다. 

삶을 예술로 만드는 서사의 비밀이 아이러니와 미스터리다. 아이러니와 미스터리는 단순한 이야기를 서사예술로 만든다. 서사의 매혹은 아이러니에서 탄생하고 미스터리로 신비로워진다. 매혹적인 서사는 작품으로 남고 신비로운 이야기는 대중의 기억에 남는다. 

2016년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은 192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출발한 첩보, 서스펜스 영화다. 밀정 조회령이 의열단원 주동성을 밀정으로 단죄하고, 일제 경찰 이정출이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이 하지 못한 작전을 완수해내는 아이러니가 서사를 지배한다. 서로 접근하고 교란하는 인물들은 도무지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의 연속이다. 개봉 20일 만에 700만 관객을 동원한 힘은 잡아야만 하는 자와 잡혀서는 안 되는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와 미스터리에서 비롯된다. 

<밀정>에 앞서 만주를 무대로 더 아이러니하고 미스터리한 영화를 만든 것도 김지운이었다. 2008년 개봉한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일제 강점기 만주가 아니면 벌어질 수 없는 사건을 다룬 영화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좋은 놈 박도원(정우성)과 나쁜 놈 박창이(이병헌), 이상한 놈 윤태구(송강호)의 이야기다. 그런데 박도원은 정말 좋은 놈일까. 박창이는 나쁜 놈이기만 한가. 윤태구는 왜 이상한 놈인가. 영화를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다. 좋은 놈이 나쁜 놈이 되고, 나쁜 놈이 좋은 놈 같기도 하다. 이상한 놈은 좋은 놈 같기도 하고 나쁜 놈 같기도 하다. 이 세 놈놈놈은 전혀 다른 인간들인데 어느 순간에 보면 한 놈 같기도 하다. 이 세 놈의 정체와 세 놈이 거느린 서사는 얼핏얼핏 알 듯 모를 듯하다. 하여튼 세 놈 다 이상하다. 

그러나 좋은 놈이 나쁜 놈이 되고 나쁜 놈이 좋은 놈이 되고 이상한 놈이 더 이상한 놈이 되는 이 서사의 미스터리는 만주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미스터리에 비하면 차라리 평범하다. 끝내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의 아이러니한 캐릭터는 만주와 연해주의 바람으로 흩어진 항일무장투쟁 전사들의 아이러니한 최후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윤동주 묘지 앞에서

네 개의 만주가 가진 아이러니와 미스터리

우리 역사는 1920년대에만 만주와 연해주에 포진했던 100개가 넘었던 항무장 투쟁부대와 2만 명이 넘었던 독립군의 존재를 철저하게 지우고 덮어버렸다. 

철혈광복단의 군자금 15만 원 쟁취작전도 우리 역사가 오랫동안 덮어버린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드라마 <도적-칼의 소리>, 소설 <범도>는 항일무장투쟁사의 위대한 순간들을 배반한 우리 역사를 향한 반격이자 복수 혈전이었다.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무장투쟁사의 수많은 사건 중에서 대중에게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 사건이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소재로 잇따라 호명된 건 서사적 매혹과 신비를 창출하는 만주의 아이러니와 미스터리 서사의 결정판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만주에는 네 개의 만주가 있었다. 중국의 만주와 조선의 만주, 러시아의 만주, 일본의 만주가 있었다.

네 개의 서로 다른 만주가 서사적 배경으로 어떻게 한 공간에 존재하는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는 하얼빈이다. 땅은 중국 것인데 건물은 모두 러시아 양식이다. 중국의 자연 위에 세워진 러시아의 문양과 색상들이 언제 보아도 이질적이다. 

하얼빈에서 서로 다른 네 개의 만주가 어떻게 만나고 격돌하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 작전이었다. 러시아가 건설한 중국도시 하얼빈에서 격살 당한 자는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였고, 격살자는 한국인 안중근이었다. 

영국에서 배운 지식으로 조선을 병탄한 일본 침략자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한 기차에서 내리다 청나라의 하얼빈역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에게 사살당한 이 사건은 오늘날 아세아의 문제를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범도』 2권 281p

네 개의 만주가 어떻게 서로 만나고 격돌하는지를 가장 격렬하게 보여준 사건은 철혈광복단의 군자금 15만 원 쟁취작전이었다. ‘15만 원 탈취사건’으로 알려진 이 작전은 회령과 두만강 너머 용정 사이에 있는 동량리 입구의 중국 땅이다. 이 중국 땅에서 조선 청년들이 일본인 경찰이 호송하던 현금 수송 마차를 털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무기를 사러간다.

영화 <놈놈놈>과 드라마 <도적>, 소설 『범도』의 배경이 되는 군자금 쟁취작전에서 철혈광복단원들이 획득한 군자금은 15만 원이었다. 당시 독립군 한 명의 무장에 필요한 자금이 30원이었다. 30원이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대가 처분하는 소총 한 정과 탄환 1백 발, 한 세트를 구입하던 시절이었다. 독립군 5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거금 15만 원을 쟁취했던 철혈광복단원 한상호와 윤준희, 임국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놈놈놈>과 <도적>을 본 사람들조차 자신이 본 영화보다 훨씬 아이러니하고 미스터리한 실재 사건이 만주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범도루트 대원들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복수 혈전과 ‘범도 루트’

소설을 읽은 사람은 영화와 드라마를 본 사람들과 달리 군자금 15만 원 쟁취작전의 전말을 안다. 소설 『범도』를 읽은 사람은 누구나 철혈광복단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미스터리한 작전현장에 가보고 싶어 한다. 그것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소설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그 사건을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다루어서만도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와는 다른 소설의 장르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차이다. 잘 만든 영화와 드라마가 보여주는 힘은 대단하다. 관객과 시청자를 압도하며 몰입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든 영화나 드라마도 서사 속의 인간들이 겪는 아이러니한 삶을 함께 살아보는 경험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소설은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다. 진정한 역사소설은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시간, 살아보지 못한 공간을 살아볼 수 있는 깊은 경험을 제공한다. 그 어떤 과학이나 이론으로도 증명할 수 없지만 인간의 삶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아이러니한 진실에 다가가는 ‘길 없는 길’이 소설이다. 

 『범도』를 읽은 독자들이 역사가 외면한 현장에 가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자신이 경험한 다른 삶의 실재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만주는 처음 찾아가는 낯선 공간이 아니라 소설로 이미 살아본 추억의 공간이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영상을 감상하는 영화나 드라마 향유자들과 달리 소설의 독자들은 추상적인 기호로 된 문자를 스스로 이미지로 바꾸는 형상화 작업을 하고 서사의 전후 맥락을 연결해가면서 읽어나가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대단히 능동적인 서사 예술의 향유자들이다. 소설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발휘하는 능동성은 상당한 창작의 영역에 속한다. 최근 들어 관심을 얻고 있는 만주와 연해주 역사탐방에 소설 『범도』의 독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소설이란 장르의 독자들이 지닌 창작자로서의 능동성과 무관치 않다. ‘범도 루트’에 오는 사람들 대다수는 단순한 이야기의 소비자가 아니라 소설을 자신의 방식으로 완성하고 재생산하는 자가 창작자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범도』를 읽은 독자, 시인, 작가, 감독들과 함께 가는 ‘범도 루트’에서 『범도』가 보여주려고 한 만주의 미스터리와 아이러니를 분명하게 구별해서 강조한다.

만주의 미스터리는 배반한 역사가 강요한 미스터리다. 벌써 오래전에 역사가 밝히고 충분히 각주를 달았어야 마땅한 사건들을 역사가 외면함으로써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은 것이 만주의 미스터리다. 철혈광복단원들이 쟁취한 군자금을 일제의 손에 다시 넘겨주고, 그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민족반역자들이 득세하면서 대한민국은 당연히 밝혔어야 할 그 역사의 진실을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겨두었다. 만주의 역사적 진실은 한 번도 미스터리로 남겨지기를 원한 적이 없다.

 

중국 방천의 <북중러 3국 국경>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념비에 새겨진 단단한 비극

만주에 아로새겨진 아이러니는 강요된 만주의 미스터리를 청산해나가는 서사의 신비와 힘이다.

내가 길 위의 항일무장투쟁 역사학교 ‘범도 루트’의 시작 장소를 언제나 와룡동 창동중학교로 잡는 이유는 만주의 피눈물 가득한 아이러니의 상징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황무지였던 와룡동을 개척한 사람들은 두만강을 건너온 함경북도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해가 잘 드는 산기슭 구릉지를 개간해 밭을 일구고 물길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시작한 그들이 큰 마을을 이루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학교의 건립이었다. 배운 자들이 팔아먹은 나라에서 살길이 없어 떠나온 농민들이 자식들을 가르치겠다고 세운 아이러니한 학교가 창동중학이었다.

‘배만 채우고 산다면 사람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우리는 배우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가르치자.’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이 다닌 용정의 명동학교와 더불어 북간도 민족교육의 중심으로 부상한 창동중학은 와룡동의 아이들만 다니는 학교가 아니었다. 남만주와 북만주, 연해주에서도 유학을 왔다. 멀리서 온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 비용 전액을 와룡동 주민들이 댔다.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지만 멀리 공부하러 온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먹이고 재웠다. 

교사들은 ‘입살이 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살이 선생’은 급여 없이 숙식을 제공받는 것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입살이나 하면서도 그들은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다. 

배워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들어온 창동학교에서 학생들은 금방 깨달았다. 나라 없는 망국노는 노예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국내에서 3.1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동포들은 용정의 서전벌에서 ‘조선독립축하회’를 열고 조선독립을 선언했다. 집회를 끝낸 3만여 동포들은 ‘대한독립’ 깃발을 앞세우고 일본총영사관을 향해 시위행진을 벌였다. 17명의 동포들이 피살되고 40여 명이 부상한 이날 시위에 창동학교 교사와 학생 전원이 참여했다. 와룡동 주민들도 몸이 성한 사람은 모두 나갔다.

선두에 섰던 창동학원 교사 박문호는 총탄에 맞아 시위현장에서 사망하였다. 1920년 1월 ‘군자금 15만 원 쟁취작전’을 주도한 철혈광복단원 임국정과 최봉설은 창동학교 졸업생이었고, 한상호는 창동학교 20세 젊은 교사였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조선인들을 잔인무도하게 학살한 ‘경신참변’ 과정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한 정기선도 와룡동 창동학교의 교사였다. 일본군은 정기선을 고문하면서 얼굴 가죽을 벗겨내고 두 눈알을 파내어 죽였다. 짐승과 다른 사람으로 살자고 세운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죽음을 당했다. 

일본군 토벌대가 이 학교를 막사로 쓰려고 하자 졸업생과 주민들이 학교를 불태우고 자진 폐교했다. 불에 탄 학교 건물을 다시 지은 1935년 9월 12일, 이 학교 졸업생들은 학교 뒤 양지바른 언덕에 스승의 은혜를 기리고 칭송하는 사은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야 말로 만주의 비극적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기념비적 기념비다. 

창동중학 원장 오상근 이병휘 남성우. 은사 신흥남 김종만 홍우만 이진호 김이택 송창희 서성권 문경.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교양하셨도다. 위대하도다. 스승의 은혜, 아름다워라 창동이여! - 이 원을 거쳐간 200여 제자들은 스승의 은공을 이 비에 세워 칭송하노라

이 사은기념비에는 누가 얼마나 많은 돈을 내서 이 학교를 지었는지, 학교운영비를 희사한 유지가 누구였는지, 이 학교를 나와 출세한 인물이 누구인지 한 마디도 없다. 오직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교양한’ 은사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호명하고 “위대하도다 스승의 은혜, 아름다워라 창동이여!”라고 칭송했다. 나는 지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은기념비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러나 ‘범도 루트’를 시작하는 창동중학 사은기념비의 더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새겨진 글자가 아닌 새겨지지 못한 이름 셋에 숨겨져 있다.

 

압록강 단교에서 압록강 철교를 배경으로, 오른쪽은 『범도』 작가 방현석

창동중학에 여전히 남은 아이러니와 미스터리

창동학교 졸업생들이 정작 가장 새겨두고 싶었을 교장 마진, 교사 한상호, 정기선의 이름은 사은기념비에 없다.

마진은 창동학교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군사훈련과를 특설하여 항일무장투쟁 전사 양성에 앞장섰다. 와룡동의 창동학교와 용정의 명동학교 교사, 학생들로 무장투쟁 결사대 ‘충열대’를 창설한 것도 그였다. 2만 명에 달하는 회원을 거느린 최대의 항일조직인 국민회의 회장으로 만주 항일투쟁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지만 2선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다. 1930년 직접 결사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작전에 나서려다가 돈화현에서 아들 마천목과 함께 일본군에게 피살당했다. 그렇게 최후를 마친 마진을 밀고한 것이 누구인지, 그의 시신을 누가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가장 많은 공로를 남기고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이들의 이름은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이 만주의 아이러니였다. 나는 『범도』를 쓰면서 마진의 자료를 무던히 뒤졌지만 그를 연구한 짧은 글 한 편 찾을 수 없었다. 마진의 삶은 결코 미스터리가 아니었지만 우리 역사는 그를 미스터리로 만들었고, 만주의 아이러니로 남았다. 

한상호는 함경북도 경성 출신으로 용정의 명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창동학교에 부임한 스무 살의 젊은 교사였다. 비밀결사조직 철혈광복단에 뛰어든 그는 창동학교 출신인 임국정 최봉설 등과 함께 독립군의 무장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군자금 쟁취작전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화룡현 동양리 입구에서 현금 수송 마차 호송 경찰 구니토모를 사살하고 군자금 15만 원을 쟁취하는데 성공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되어 1921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일본영사관 지하 고문실에서 눈알을 파내는 고문을 당하고 죽은 교사 정기선의 이름도 창동중학 사은기념비에는 없다. 

마진, 한상호, 정기선. 창동중학 졸업생들은 가장 기억하고 싶었던 이름들을 기념비가 아닌 가슴에 새기는 아이러니를 감당해야 했다. 되찾은 나라에서 그들의 가슴에 든 이름을 꺼내 주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철혈광복단의 15만원 쟁취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이 무기를 살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보름 동안 죽음보다 더한 고문을 견뎌냈던 은행원 전홍섭의 생애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전홍섭이 그렇게 지켜낸 철혈광복단원들을 밀고한 자는 누구인가. 엄인섭이란 추정만 있을 뿐 그 실체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범도루트 대원들

아직 출전 대기 중인 주인공이 너무 많다

항일무장투쟁사를 배반한 권력과 역사가 강요한 미스터리는 이제 끝나야 한다. 

다시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 소설로 이어지는 만주의 서사는 선혈 낭자했던 100년 전 항일무장투쟁사의 명백한 실체를 미스터리로 만든 배반의 역사를 향한 복수혈전이다. 아직 출전을 기다리는, 가장 크게 희생하고 가장 철저하게 잊혀진 아이러니의 주인공들이 너무 많다. 그들과 함께 펼치는 서사예술의 복수혈전은 우리 역사가 만주에 더 이상의 미스터리를 남겨두지 않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주와 연해주로 이어지는 길 위의 항일무장투쟁 역사학교 ‘범도 루트’에 참여하는 독자와 작가, 시인, 감독, PD, 제작자, 예술가, 역사학자의 많은 숫자가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글·방현석 
1988년 <실천문학> 봄호에 단편 ‘내딛는 첫발은’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장편 『십년간』, 『당신의 왼편』,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등이 있다. 이대환의 장편소설 『슬로우 불릿』을 시나리오로 각색한 바 있으며, 35mm 단편영화 <무단횡단>을 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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