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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OLD OAK’를 바로잡기 위한 ‘용기·연대·저항’
낡은 ‘OLD OAK’를 바로잡기 위한 ‘용기·연대·저항’
  • 이수향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4.02.2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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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올드 오크>

1. ‘K(ingdom)’의 위태로움에 관하여

켄 로치 감독은 <지미스 홀(Jimmy's Hall)>(2014)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2016),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2019)를 지나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2023)에 이르면서 몇 번의 번복을 거쳐 다시금 고별 인사에 다다르고 있다. 각본가 폴 래버티와의 공동 작업도 지속되고 있으며 영국의 역사와 정치 상황에 기반한 노동 계급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 역시 동일한 주제의식으로 변주된다. 

켄 로치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해가 지지 않는 ‘왕국(United Kingdom)’이었으며 산업화의 시작이었고 또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던 ‘영국’의 특수성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발전과정의 첨병이던 영국을 투과한다는 것은 나아가 자본주의와 노동 계급의 전 세계적 당면과제라는 현 시대의 보편적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쇠락한 영국 북동부의 한 마을에 떠들썩한 소음과 함께 버스가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등 이전 작품에서도 익히 활용된 켄 로치식의 도입부는 이미지보다 앞서 빈 화면에 등장하는 보이스 오버가 특징적인데, 먼저 도착한 목소리들이 향후 펼쳐질 사태와 사건에 대해 일종의 소요로서 기능한다. 요컨대 저 멀리 있는 한 무리의 이야기나 그들의 사정이 원경화되어 있을 때는 우리에게 닿지 못하지만, 그것이 수런거리는 소리들로 인식될 때 우리에게 지각되기 시작되며 이에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인지 주목할 때, 비로소 화면이 밝아지며 영화의 사건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소녀 ‘야라’를 포함한 시리아 난민들이 타고 있던 버스가 1980년대 영국의 광산 파업 이후 조용하게 쇠락해가고 있던 백인 노동계층 구성원의 마을에 이물질처럼 불쑥 침입한다. 종교와 인종, 이방인이라는 기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거부감 외에도 폐광촌이 된 후 경제적 기반을 잃고 활기도 사라진 채, 싸고 낡은 변두리의 촌동네에서 나이 들어가고 있던 주민들은 이 시리아 난민들에 대해 깊은 적대감을 드러낸다. 

마을에서 오래된 펍 ‘올드 오크(The Old Oak)’를 운영하는 중년의 ‘티제이(TJ)’는 야라의 카메라를 망가뜨리고 난민들에게 혐오를 드러내는 주민들에 맞서 난민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주민과 난민 간의 갈등은 점점 심해진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모여서 담소하고 술을 마시는 휴식과 사교의 공공장소이자, 파업의 역사적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올드 오크가 난민들에게 침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티제이는 자신의 생업인 펍의 운영과 오랜 지인들과의 관계마저 흔들릴 위기에 처하면서 모종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인다. 

그런 의미에서 표제이자 배경인 올드 오크 펍을 도입부의 설정쇼트(establishing shot)로 보여주는 장면들은 이 영화의 배경과 영국의 현실에 대해 알레고리적 함의를 지닌다.

티제이의 가게 간판의 글자 ‘oak’에서 ‘k’자가 떨어져서 자주 말썽을 일으킨다.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장대를 이용해 애써 ‘바로잡아’ 놓고 티제이가 안심하고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순간, ‘k’는 다시금 아무렇지도 않게 스르륵 떨어진다. 이는 광산파업의 실패 이후로 낡아가고 있는 마을과 브렉시트 이후로 쇠락해가는 영국의 운명을 나란히 현시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감독 켄로치에게 은퇴를 번복하게 한 것도 경제적 불평등, 계급적 차별 외에도 난민과 인종 문제 등 나날이 새롭게 적대의 구도가 재편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행동 중인 사회주의’(존 힐, 『켄 로치-영화화 텔레비전의 정치학』, 이후경 옮김, 컬처룩, 2014, 446쪽.)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켄 로치로서는 기존의 항쟁이 지닌 관점들이 목표를 상실하고 시민들과 노동자들에게 혼란이 가중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회적 정의와 연대의 가치를 다시금 ‘바로잡아’ 추동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2. 키친 싱크 리얼리즘이 지닌 미학성의 문제

켄 로치가 칸 영화제에서 자주 호명되거나 수상을 한 것과는 별개로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일관된 목적성에 관해 가치평가를 절하하려는 시각들도 분명히 있다. 즉 이 감독이 주장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입장이 ‘영화적인 것(cinematic)’을 초과하며 당위가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시선이다. 이는 예술의 오랜 난제인 형식과 내용 사이의 미학성에 관한 논쟁을 상기시킨다.

가령, ‘저항’과 ‘연대’라는 정언명령적인 주제가 늘 먼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작품마다 다른 스토리텔링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의 영화들은 어떤 윤리적 스탠스를 취할지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켄 로치의 영화들은 캠페인 영상이나 시민 윤리 교육을 위한 자료처럼 보이기도 하고, 화려한 시각적인 연출이나 구성상의 이채로움, 플롯의 돌발적인 전복 등의 미학적 실험을 철저히 배제한다. 다소 심심하고 밋밋한 전개들을 대신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재현이다. 야라의 가족들과 난민들에게 주민들이 보여주는 적개심에는 낮은 생산성을 지닌 임금의 일자리와 한정된 공간의 공유 문제,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불만들이 있으며 굳이 이들의 발언을 거르지 않는다. 그러는 한편 그런 갈등이나 알력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이 자라고 학교에 가고, 누군가는 아프고 죽는,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보편성을 천천히 보여준다.

최근에 방영된 EBS의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켄 로치 편에서는 직접 그가 밝히는 영화 제작의 규범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스타일적으로 꾸밈이 적고 인간관계에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거죠. 캐릭터들의 관계가 영화의 모든 것이니까요”, “편집하고 잘라내고, 또 덜어내고, 최대한 단순하고 실속 있을 때까지 잘라내고 꾸밈없이 보여주려고 노력하면 캐릭터들의 관계가 드러나죠. 영화는 소박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진실성이 느껴지는가’예요.” 이와 같은 말들은 그가 영화적 스타일리시함에 집중하기보다는 시간과 공간마저 그대로 현실에 기반해 재현해 내려는 욕망에 더 침잠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켄 로치의 영화가 예술적 미학성을 벗어나는 태작들에 불과한가의 물음에 관하여 다른 판단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요컨대 영화 미학의 완성도를 이미지와 구성, 편집 중심의 영화 내적 규범성을 중심으로 완고하게 판단하지 않는다면, 형식화되는 세련된 현대 영화 산업 시스템의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미학성을 새롭게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작품에 대한 엄격한 절제를 통해 비전문 배우라든가, 서사 순서대로 촬영하기, 카메라 고정하기 등 리얼리즘적 규격성에 대한 표준화된 형식 미학을 만들어가려는 천착이 지닌 가치론적인 측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흔히 붙는 별칭, ‘키친 싱크 리얼리즘(kitchen-sink realism)’이란, 부엌의 싱크대처럼 온갖 생활의 찌꺼기들(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모두)이 모여서 하수도(즉 사회의 저변)로 내려가는 곳이라는 메타포를 차용한 것이다.(이성철·이치한 지음, <철도 민영화와 비정규직 노동자-켄 로치의 <내비게이터 The Navigators>,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호밀밭, 2008, 201쪽) 그런 의미에서 내용과 형식의 균형성이라는 영화적 재현의 측면에서 잘 빚어진 항아리로서의 황금률을 제시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산 파업에서 같이 연대하고 저항했으나 실패했던 노동자들은 쓸쓸한 열패감 속에서 침잠해 있으며, 옛 저항의 기억들은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라는 액자 속의 글자와 사진들로만 남아 조각만한 자긍심으로 지탱되고 있다. 켄 로치는 노동자/자본가 혹은 노동자/정부로 상정되었던 대립항이 이제 노동자/이방인(난민)으로 대치되어 가는 상황을 제시하면서 좌파적 연대의 구도가 노동자 내부의 혹은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또 다른 하위 계층 간의 싸움으로 격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들이 외부로부터 온 난민들에게 보이는 제노포비아적인 행태가 또 다른 파쇼주의적 위험성을 내재한 것은 아닌지를 묻게 하는 것이다. 또 내부의 갈등이 외부의 더 큰, 진정한 적을 형해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삶이 힘들 때 우린 희생양을 찾아. 절대 위는 안 보고 아래만 보면서 우리보다 약자를 비난해. 언제나 그들을 탓하지. 약자들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게 더 쉬우니까.”라는 티제이의 말이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3. 포기하지 않는 단단한 저항의 회복

이 작품의 중요한 갈등 구도 중 하나는 ‘공간’을 내어준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작게는 올드 오크라는 펍이고, 나아가서는 마을이라는 공동체이며, 궁극적으로는 난민들에 대한 수용 문제이다. 켄 로치에게 ‘공간’은 계속 강조되어온 주제라 할 수 있는데, 마을의 공동체 공간이든(<지미스 홀>), 미혼모가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든(<나, 다니엘 블레이크>), 모빌리티에 포획된 채 장소성을 상실해 노동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노동자의 공간이든(<미안해요, 리키>), 새로운 이방인들에게 내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느냐의 문제이든 쉽게 답을 내리기 힘든 질문이라는 점을 외면하지 않는다. 켄 로치는 이를 돌파하기 위해 첨예한 대립과 각론을 보여주며 설득하는 대신 가까운 이웃에 대한 작은 온정의 불씨를 되살리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난민 수용에 대한 합리성이나 윤리적 지침을 설파하는 대신, 함께 모이고 먹으며 바로 옆의 몇을 향한 최소한의 도의적인 선의를 보여주는 주는 것으로 공간과 마음을 내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야라는 주민들을 펍에 모아서 사진 슬라이드 상영회를 연다. 이를 통해 힘들었으나 투쟁의 열기가 가득했던 1984년 광산 파업의 기억들이 천천히 상기된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과거를 감동으로 포장하는 대신, 매우 일상적인(ordinary) 태도로 흑백 사진들을 연속적으로 제시하면서 지나간 연대의 기억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과도한 장면 테크닉과 과잉된 인물들의 감정도 배제한 채, 정직한 음악을 곁들여 그때 그곳에서는 모두가 함께 했었고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했음을 알려주면서 잊혀진 혁명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켄 로치는 위험하고 음침한, 공간을 잠식하러 온, 테러분자라는 풍문들을 통해 난민에 대한 공포가 엄습할 때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내려두고 개개인의 사적인 좁은 네트워크에서의 최소한의 선량함을 열어둘 것을 권면하는 듯 보인다. 테러리스트와 히잡과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라면 문을 걸어 잠그게 되지만, 옆집의 아이가 몸이 아프다면, 또 이웃의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다면 그들에게 약과 꽃을 들고 방문할 수 있으리라고 다시금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좀 더 직관적으로 필생의 주제를 천명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돋보인다. 영화의 서사를 벗어나 시위의 장면이 등장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깃발을 들고, ‘용기, 연대, 저항’을 외친다. 영국판 작품 포스터에서는 가운데에 오크나무를 배치한 채, 휘장 띠의 윗쪽에 영어로 ‘STRENGTH, SOLIDARITY, RESISTANCE’이라고 쓰고, 이를 아랫쪽에 다시 아랍어로 쓴 것이 눈에 띈다. 즉 저항과 연대의 범위를 확대하여 난민들에게도 공간을 내어준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제목과 관련해서 영국에서 오크나무의 상징성에도 주목할 수 있다. 오크나무는 찰스 2세가 1650년 남북전쟁 중에 숨어 있던 데에서 유래하여 로얄 오크(Royal Oak)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많은 장소와 사물에 오크가 붙여지는데 특히 영국의 펍의 이름 중에 흔하다고 알려졌다. 단단하고 생명력이 강하다는 점에서 종종 연대와 저항의 상징이 되는 이 ‘낡은(old)’, ‘오크(oak)’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노감독의 당부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강연에서 켄 로치는 영화인의 사명을 “우리는 영화인이기 전에 시민입니다. 영화인은 그래야 해요. 화가는 어떤지 모르지만요. 저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공부하고 시민이 먼저 되세요.”라고 말한 바 있다. 은퇴를 앞둔 그가 남기고 떠나는 영화적 미학성의 핵심이 스타일(style)이 아닌 사상과 가치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주제의식을 극대화하기 위한 최선의 고안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너무 명확하게 방향성을 가리키는 켄 로치의 작품 세계의 우직함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장인적 기율(紀律)이 작가주의적 태도로서 유의미함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이수향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상물등급위원회 소위원. 한예종 강사. 문학과 극예술의 연대를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다시 한국영화를 말하다』, 『영화와 관계』, 『1990년대 문화 키워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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